"MB, 일본서 위안부 얘기할 수 있을까?"

[현장] 뉴욕 한복판에서의 절규 "일본은 사죄하라"... '수요집회 천번째' 연대시위

등록 2011.12.15 19:05수정 2011.12.15 19:05
0
원고료로 응원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뉴욕 맨해튼 주미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 오래전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 앨렌 제이머(57.왼쪽)씨가 시위대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뉴욕 맨해튼 주미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 오래전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 앨렌 제이머(57.왼쪽)씨가 시위대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최경준

14일 낮 12시(현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일본총영사관 앞. 점심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기던 앨렌 제이머(57)씨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건물 앞에 몰려있는 10여 명의 한국인들이 들고 있던 피켓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피켓에는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손목시계를 한 번 쳐다본 제이머씨는 경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 안에 있는 시위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시위대 중 한 명을 붙잡고 한참 얘기를 나누더니 "일본 정부는 당연히 사죄해야 한다, 당신들의 행운을 기원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목적지를 향해 다시 발을 떼어놓는 그를 붙잡고 "저들이 무슨 시위를 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읽은 역사(책)를 통해 일본군이 한국 여인들을 유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 피해(위안부) 여성들 또는 그들의 가족에게 진심으로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사죄를 해야 한다. 지난 세대의 일이지만, 명백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전기 엔지니어인 제이머씨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약 25년 전 일이다. 당시 모 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과 역사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당시 받은 강렬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맨해튼 한 가운데서 시위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제이머씨도 이날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1000번째 시위가 열렸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기자의 설명에 그는 많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시위를 했는데도) 일본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뉴욕 맨해튼 주미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뉴욕 맨해튼 주미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최경준

'병가' 내고 참석한 '수요집회 천번째' 시위 "일본 부끄러운줄 알아라"

이날 일본 뉴욕총영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 천번째' 국제 연대시위를 바라본 미국인들이 모두 제이머씨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일부 미국인들은 시위대가 나눠주는 영문 유인물을 유심히 읽어보는 모습이었지만, 대부분은 무심코 시위대 앞을 지나쳐갔다. 한 미국인은 시위대 안에서 들려온 '일본'이라는 말에 "일본? 나는 일본을 정말 좋아해"라며 웃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피켓을 들고 줄지어 건물 앞을 맴돌면서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하라" 등의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대부분 직장이 있는 이들은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위에 참석했다. 게다가 숫자도 많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들의 목소리가 자동차 등 도시 소음에 묻힐까봐, 그리고 고층 빌딩 위에 자리 잡은 일본 총영사관에 들리지 않을까봐, 더욱 목에 힘을 줬다.

개별적으로 구호를 외치다 목이 메면 모두 그 자리에 서서 팔뚝을 치켜들고 함께 구호를 외쳤다. 점심 식사를 위해 나오거나, 도시락을 사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일본영사관 직원들은 애써 시위대를 외면하려는 듯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날 시위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됐다. 6·15공동선언실천 뉴욕지부, 인터넷카페 '소울드레서', 한인진보청년모임 노둣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주로 참여했지만, 이날만큼은 모두 단체의 이름을 뒤로 내려놓고 개별 참여 형태를 띠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과 한은 이념과 성별,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인권과 평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뉴욕 맨해튼 주미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 노천희(61.왼쪽)씨와 김수복(67)씨가 "일본은 사죄하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뉴욕 맨해튼 주미 일본총영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 노천희(61.왼쪽)씨와 김수복(67)씨가 "일본은 사죄하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최경준


그 와중에도 노천희(61)씨의 구호 소리가 가장 두드러졌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길을 가던 시민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마치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대변이라도 하듯, 그는 일본 총영사관을 향해 절규하듯 소리쳤다.

"일본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노씨는 "일본은 끊임없이 정신대가 조작된 것이라고 했지만, 1991년도에 이미 희생자 본인들이 나섰으니,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줄 알았다"며 "그런데 내년이면 20년이다. 천번째 집회를 한다니, 이건 정말 분통터지는 일 아니냐"고 분개했다. 그는 이어 "264명의 할머니들 중에서 이제 60여 명 정도 남았다"며 "가끔 (육성 증언을 하기 위해) 뉴욕에 오셨던 할머니들도 한 분, 한 분 다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45년 전 여고생 시절 <선데이서울>을 통해 처음 '정신대'라는 말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84년 미국에 건너 온 뒤, 현재까지 도서관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2년 뉴욕에 온 황금주 할머니의 육성 증언을 듣고 난 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집회는 빼놓지 않고 참석해왔다. 특히 <아사히신문>의 기사를 통해 <선데이서울>에서 보도했던 노수복 할머니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가족까지 데리고 시위에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는 "간혹 한국에 갈 일이 있을 경우에도 장학동(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며 "2007년 미국 하원 위안부 결의안 채택 당시 워싱턴DC까지 가서 직접 의원회관을 돌며 로비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건강이 나빠지면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활동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5일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팀이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를 방문하는 현장에 갔다가 우연히 이날 집회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노희천씨는 이날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직장인 도서관에 "몸이 아프다"는 거짓말을 하고 결근했다.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워싱턴DC 주미 일본대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워싱턴DC 주미 일본대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사람사는세상 워싱턴

노천희씨에게 연대시위 소식을 전해준 김수복(67)씨는 "일본 정부에 항의도 하고, 할머니들의 원을 풀어드리는 데 작은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위를 준비했다"면서 "특히 한국에 있는 뉴라이트에게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에도 좋은 일본 사람들이 많다. 똑같이 한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지 않나. 솔직히 내 조상은 친일파였다. 나는 나름대로 회개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친일을 해서 부자가 되고, 이제까지 그 부를 누리면서도 사과조차 안 하고 오히려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지지해주려는 뉴라이트는 더 나쁜 한국인이다."

신우익 성향의 뉴라이트가 "일제 강점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위에 참석한 에스더 리(55) 목사도 "어제 신문을 보니까, 어떤 할머니는 남자 두 명한테 끌려갔는데, 하나는 일본군이고 하나는 조선인이었다고 하더라"며 "젊은 조선의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데 일부 한국인도 공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일본 앞잡이와 하수인으로 권력을 추구하고 부를 누렸던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청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연장되고 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조만간 일본에 간다고 하는데, 과연 거기에서 정신대 얘기를 꺼낼 수나 있을지 걱정"이라고 한탄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오는 17일부터 이틀간 일본을 방문하기로 한 가운데,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가 공식 거론될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워싱턴DC 등 일본대사관에 결의문 전달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워싱턴DC 주미 일본대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번째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워싱턴DC 주미 일본대사관 앞에서도 연대시위가 열렸다. 사람사는세상 워싱턴
한편 이날 워싱턴DC의 주미 일본대사관 앞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책임 이행을 촉구하는 연대시위가 열렸다. 이 시위에는 워싱턴지역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를 비롯해 지역한인회, 사람사는세상 워싱턴 등 10여 개 민간단체들이 참여했다.

위원회는 성명에서 "정신대문제 결의안이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지 4년이 지났다"면서 "오늘 피해자 할머니들의 천번째 수요집회를 맞아 각 지역단체가 연대해 시종 묵묵부답인 일본 정부의 무성의에 항의한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시위에 이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반대, 일본의 역사왜곡 규탄 등의 내용을 담은 결의문을 일본대사관에 전달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따르면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캐나다·대만·독일·필리핀·호주·스코틀랜드(영국)의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 앞에서도 이날 연대시위가 열렸다.
#위안부 #종군위안부 #정신대 #수요집회 #뉴라이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3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