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제1기 공사 착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박태준 사장(왼쪽), 김학렬 부총리가 버튼을 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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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포스코는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로 성장했습니다만 출발 당시에는 제철소 건설작업조차 순탄치 않았습니다.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던 그가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영일만 백사장을 처음 밟았을 때만 해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제철소 운영 경험이나 기술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자금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1인당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한국에 거액을 투자를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개인이나 기업을 찾기란 어려웠습니다. 어렵사리 미국으로부터 투자약속을 받아내 영일만에 부지까지 마련했으나 미국측은 차관 제공 약속을 깨버렸습니다. 후진국인 한국이 제철사업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당시 세계은행(IBRD)의 보고서가 결정적으로 훼방을 놓은 셈입니다.
바로 이 때 박태준이 생각해낸 것이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당초 이 돈은 농업분야에만 쓰도록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청구권 자금의 전용 협상을 벌였는데 소위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을 편 것이 주효했다고 합니다.
'부산적기론'이란 부산에 적기(赤旗)가 펄럭이면, 즉 한국이 공산화 되면 일본도 공산화 위험이 있다는 주장인데 한 때 일본사회에서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직원들에게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을 통해 제철소 건설자금이 확보되자 1970년 4월 1일 포항 영일만 백사장에서 포항제철 제1기 공사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착공식에는 박 대통령, 박태준 포철 사장, 그리고 김학렬 부총리가 참석해 발파 버튼을 눌렀는데, 이로써 '철강 한국'의 첫걸음이 떼진 것입니다. 놀랍게도 포철은 조업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달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남 광양에 제2제철소 건설, 1992년엔 2천1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하면서 그는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1987년 그는 현역 철강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철강의 노벨상인 '베세머 금상'을, 1992년에는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했는데 그의 별명 '철강왕'은 이때부터 붙여졌습니다. 경제인으로 산 전반기 그의 삶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공로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후 명예회장직 박탈... 일본으로 망명반면 정치인으로 산 그의 후반기 삶은 패착과 좌절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정계 진출은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가 정계에 진출한 것은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서 참여한 데 이어 1981년 11대 전국구 의원(민정당)으로 당선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는 육사 후배인 전두환·노태우(11기) 정권 시절 '박 선배' 소리를 들으며 상당한 위상을 갖고 있었고, 민정당 대표위원, 민자당 최고위원 당시 집권당의 얼굴마담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김영삼(YS)이 집권세력에 합류하면서 그 영광은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결국 YS와 결별하게 되는데 이유는 대선을 앞두고 내각제를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내걸 것을 요구하다가 YS와 갈등을 빚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해 10월 박태준은 민자당을 탈당하였는데,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2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었고, 40년간 살아온 서울 아현동 자택이 압류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0여 평 남짓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4년 여간 망명생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문민정부 말기인 1997년 2월 귀국한 그는 1997년 5월 포항 보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그해 11월 김종필(JP)이 이끄는 자민련에 입당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두고 그는 언젠가 "부덕의 소치인지 93년 봄 이후 죄인 아닌 죄인의 몸이 되어 4년 가까이 해외를 전전했다"며 불편한 심기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 줄기 서광이 비친 것은 1997년 9월 'DJP 연합'이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JP의 권유로 자민련 총재에 취임한 그는 국민의정부 출범에 한 몫을 하였는데, 김대중(DJ)과의 '만남'에 대해 그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와 인권시대와의 만남이란 인연이 작용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박태준-김대중 두 사람의 인연은 그해 한일축구전 참관차 DJ가 일본에 갔다가 현지서 박태준을 만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만 해도 박태준은 DJ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DJ를 둘러싼 사상시비, 그리고 말바꾸기 논란은 물론 자신이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좌절의 삶을 살아온 그, 영면에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