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기념관 내부의 모습.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당시 시민들의 호응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정만진
근대 또는 현대로 들면서 대구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의 대표격은 무엇들일까? 세 가지 사건을 들라면,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 1946년의 '10.1폭동사건(대구시사의 표현)', 1960년의 '2.28민주운동(대구근대역사관의 표현)'이 될 것이다.
그동안 대구시는 국채보상운동을 기리기 위해 상화고택 바로앞의 서상돈고택 정비, 시내 중심가 작은 공원에 '국채보상공원' 이름 부여, 시민회관 앞마당에 기념동상 건립, 대구시립 중앙도서관 1층에 국채보상운동 체험실 설치 등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의 의의에 견주면 그것들은 답사지로서 많이 미흡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2011년 10월 5일 국채보상공원 안에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개관함으로써 제법 역사여행 답사지다운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대구근대역사관, '1946년 10월' 한 마디 언급도 없어그러나 '10.1폭동사건'에서부터 '10월항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을 가진 1946년 10월의 '대구사태(신복룡의 표현)'는 아무런 답사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대구시의 공식기관인 대구근대역사관은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대구 시내에서 '1946년 10월의 대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답사지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표지석도 없고, 안내판도 없다. 대구근대역사관이 단 한 줄로도 언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것들은 애당초 기대할 수 있는 일도 아닐 터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때 조봉암 후보는 대구에서 72%를 득표했다. 이승만 후보는 28% 득표에 그쳤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자는 이승만이었다. 대구사람들은 그처럼 열렬히 조봉암을 지지했지만, 전국적으로는 이승만 후보가 70%를 득표했기 때문이다.
대구 시내에 '1946년 10월'을 찾아볼 수 있는 '눈에 띄는' 답사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대구의 역사'에 대한 일정한 왜곡이다. 신복룡의 <한국분단사 연구>를 읽은 답사자가 그의 책에서 '대구사태의 진원지는 대구의학전문학교'라는 '지식'을 얻은 다음에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건물을 직접 찾아가야 하는 형편이니, 이래서야 어찌 '2011 대구 방문의 해'에 어울리는 외지인 초청 자세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