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폐쇄됐던 부산일보 인터넷 사이트가 1일 오전 재개통했다. 1일자로 발생된 신문에는 "부산일보 제2의 편지권 독립운동"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부산일보 사이트 갈무리
부산일보 사태는 또 언론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사주체제 신문사에서 편집권의 독립이 얼마나 허구가 될 수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입증했다. 기자들이 아무리 좋은 기사를 쓰고 편집 간부가 그것을 지면제작에 넣어도 경영진이 인쇄하고 배포하지 않으면 신문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 언론사에서 소유와 경영과 편집의 분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부산일보는 정수재단이 소유하고 거기서 임명한 사장이 경영하며 기자들이 편집을 각각 나눠서 맡고 있다. 그러나 그 나뉜 역할과 책임 중 어느 하나라도 비토권을 행사하면 신문은 궁극적으로 독자 손에 전달되지 못한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채 일 년도 안 된 1962년 4월 초 어느 날 새벽 5시경. 서울 청운동에 있는 부산 기업인 김지태의 자택, 건장한 남자 둘이서 이른 새벽 시간인데도 거침없이 대문의 벨을 눌렀다. 김지태의 부인 송혜영은 남편이 돌아온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새벽부터 누군가 알아보라고 일하는 아이에게 일렀다.
두 남자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송혜영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했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부산으로 같이 가야 하겠습니다.""이렇게 이른 새벽 시간에 갑자기 부산까지 가자니 무슨 일입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송혜영은 아무 잘못한 일도 없다는 생각에 당당하게 따라 나섰다. 그들은 송혜영을 지프차에 태우고는 여의도 비행장에 가서 부산으로 연행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의 수사관들은 송혜영에게 2년 전 남편과 함께 유럽에 여행갔을 때 산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한 대가 세금을 내지 않고 들여왔기 때문에 밀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당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 몸에 걸치는 장신구 하나씩은 관세 없이 휴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첫날, 송혜영을 7시간에 걸쳐 조사한 뒤 교도소로 보내 수감했다. 남편 김지태는 사업차 독일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서 간경화 증세 때문에 입원해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니 급히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도에 병원에서 퇴원하고 급거 귀국했다.
김지태는 조선견직을 창업하고 당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실크 생산업체 '한국생사'로 키워 낸 부산 출신의 대표적 기업인이었다. 기계와 방직으로 큰 돈을 번 그는 부일장학회를 설립해 부산지역의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투자했다. 부일장학회는 김지태의 투자 확대에 따라 차츰 자산을 늘려갔다. 부산MBC에 이어 한국MBC를 설립해 국영 KBS 이후 첫 민간방송을 문 열었다. 부산일보도 인수해 장학회에 기부했다.
김지태는 또 2대와 3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더구나 3대 국회 때인 1954년 11월 이승만의 중임제한 철폐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때 반대하다 자유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건실한 기업인이며 소신 강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의 비위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재산 강탈 대상자로 김지태를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정희가 1950년대 말 부산에서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내면서 모종의 악연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모의하면서 김지태에게 자금지원을 부탁했다. 당시 부산일보 주필이던 황용주가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이어서 그가 추천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김지태는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것으로 그는 쿠데타 세력의 괘씸죄를 샀다.
쿠데타 자금 지원 거절한 김지태, 정치보복성 구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