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육군 첩보부대의 북파공작원들.
MBC
이렇게 대규모의 북파공작원을 운용하면서도 정부가 지속적으로 북파공작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력 도발이나 침투를 중단하도록 규정한 정전협정을 위반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하지 않기 위해서 대한민국 공작원 시신의 확인조차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북파공작원이었던 김상학씨의 얘기다.
김상학씨는 1968년 10월 1일 특수 공장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국군 GP(경계초소) 전방에 있는 인민군 부대의 보급 담당 운전병을 납치하라는 임무였다. 김씨와 다른 5명의 공작원들은 전방 철책선을 넘어 다음 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 6시에 작전을 개시하려는데, 미리 인민군들이 알고서 둘러싸고 있었다. 공작원 중 한 명이 전날 밤 잠복 중에 담배를 피워 북한군에 위치가 노출되었던 것이다. 클레이모어(claymore mine : 사람이 직접 조작해 폭발시키는 다연발 지뢰)를 터뜨린 뒤 동료들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김씨의 증언이다.
"인민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난 뒤 침투 전 약속했던 대피처로 집합했는데, 공작원 중 한 명이 오지 않았다. 인민군 GP에 동료의 시체가 옮겨지는 것이 쌍안경으로 보였다."며칠 후 판문점에서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통해 침투 중 숨진 동료 공작원 사체의 확인을 요구했다. 한국군 측에서는 "우리 군 병사는 아니다"라며 부인했다. 당연히 시체의 송환은 거부되었다. 사체를 한국 군인이라고 확인하는 경우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북파공작원을 군인 신분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으로 보내는 이유도 이처럼 발각됐을 경우 존재 차제의 부인을 통해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가 1994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 후 41년 동안 정전협정 위반 건수는 북한 측이 42만여 건, 남한 측이 45만여 건이다. 이처럼 상호간에 수십만 건의 정전협정 위반 사례가 있는데, 정전협정 위반이 두려워 북파공작원의 시신을 송환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탈영병에 '배신자' 간판 걸고 때려 숨지게 해북파공작원은 이렇게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과연 북파공작원들은 자신의 처지가 그리 될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자원한 사람들일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컨대 김일성의 목을 따겠다고 모집한 실미도 부대원들조차도, 영화 <실미도>에서는 사형수 출신 등으로 그려져 있지만 사실 부대원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1971년 실미도사건 당시 공군본부 검찰부장(법무관)으로 이 사건 수사를 맡았던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1998년 8월 8일자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내가 수사한 바로는 훈련병들을 모집했다. 대부분 충청 출신 민간인을 요원으로 임의 차출했으며, 이들에게는 군번도 주지 않은 채 장교 계급을 달아주었다. 훈련병 중 범죄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밝혔다.
한 동네에 사는 일곱 명이 한꺼번에 훈련병으로 갔던 충북 옥천의 유가족들도 "어느 날 갑자기 시골에서 서울로 갔다. 돈을 많이 벌어 오겠다며 정체불명의 남자를 따라갔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취직을 준비하던 청년들로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북파공작원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훈련과정에서도 인권유린이 상상을 초월했다. 외출이나 면회 금지는 기본이고 부모가 돌아가셔도 통보해주지 않았다. 가혹한 훈련을 못 견뎌 탈영하거나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는 북파공작원들에게는 즉결 처분이 내려졌다. 1983년 2월 설악개발단(북파공작원 양성소)에서 '훈련 중 사망'한 목철호씨는 실제로는 탈영했다 붙잡혀 구타당해 죽었다. 목씨 동기인 김아무개씨의 증언이다.
"목철호는 탈영을 했다 잡혀왔다. 기간요원들은 그를 당구대에 묶어놓고 훈련병들에게 구타와 폭행을 지시했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목에 '배신자'라는 간판을 걸고 40여 명의 동기들로 하여금 3시간여 동안 끌고 다니면서 싸리나무 등으로 때려죽이게 했다. 그 친구가 기절하면 물을 뿌려 깨어나게 한 뒤 다시 때리고, 반복의 연속으로 그렇게 때렸다. '동기들아, 한 번만 살려달라'는 그의 절규가 눈에 선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인자가 되었다. 저 놈 때문에 우리가 죽겠다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동기를 죽이느냐 내가 맞아죽느냐는 상황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한국전쟁 당시 북파공작 실무 책임자로 활동한 임덕삼씨의 증언은 아무리 전쟁 기간 중이라 하더라도 충격적이다. 임씨는 '임추삼'이라는 가명으로 HID 북파공작원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직접 북한 지역에 들어가 공작활동을 해 많은 전과를 올린 그는 북파첩보부대 중대장이 되면서 북파요원들을 수송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씨의 증언이다.
"정보사에서는 원래 두세 번 써먹다가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버렸지. (침투했던 대원을) 받으러 가질 않는 거야. 상부에서 가지 말라고 하면 어쩔 수 없잖아. 가고 안 가고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일단 배를 타고 나가면 그때부터야 내가 상황를 보고 배를 대야겠다, 안 대겠다는 것을 판단하지만 상부에서 데리러 가지 말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정보부대라는 것들의 본질이 그래. 나도 몇 번 명령을 받아보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어. 아마 데리러 가지 않은 대원들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서) 죽었을 거야.""내가 같은 HID 요원들을 배에 태워서 데리고 가다가 총으로 쏴서 죽인 적도 있어. 물론 상부의 명령을 받아서 행한 것이지만…. 다른 때는 목선을 타고 가는데 그때는 발동선을 타고 갔었어. 가기 전에 미리 돌멩이를 새끼줄로 감아서 준비해두었지. 밤에 다들 자라고 해놓고 잠든 사이 총으로 쏴서 돌멩이에 감아서 바다에다가 버렸지….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지…. 보통 사람들이야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도 못하겠지."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보며 무슨 생각 했을까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북파공작원들을 철저하게 도구로 이용하면서도 정작 이들의 정당한 보상 요구는 무시해왔다. 북파공작원 하아무개씨의 인터뷰는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제대할 때에는 700만~800만 원을 받았는데, 집에서는 행불자로 신고한 상태였고, 예비군 훈련 기피자로 처리되어 있어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도 받았다. 운전면허 적성검사도 못 받아 운전면허증을 다시 따야 했다. 부대에 있는 동안 일체의 외박이나 외출이 허용되지 않아 어머니는 내가 나올 때까지 속앓이를 하여 속병을 앓고 계셨다. 지금은 첩보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훈련받을 때의 인권유린뿐만 아니라 계약했던 내용도 하나도 지키지 않고,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도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사회로 내몰아버린 국가가 원망스럽다."북파요원추모사업전우회 회장 김정식씨가 2001년 3월에 김성호 의원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에는 이런 답답한 현실에 대한 북파공작원들의 분노가 잘 담겨 있다.
"우린 범법자나 불량한 깡패들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는 민간인들을 감언이설로 꾀어서 살아 돌아오면 1967년 당시 기준으로 500만~700만 원의 보상과 사회에 나갈 때에는 국가기관 특채를 약속했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우리는 그들이 언급한 내용을 문서로 받아낼 수 없었고, 막상 사회로 내보낼 때 관계자들은 피신해서 책임을 회피할 뿐, 현재까지 군사기밀 운운하면서 피해 당사자들의 말문과 목줄을 죄어왔던 것입니다. (줄임) 북한은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인 남파공작원들을 대대적인 환영 행사로 맞이하며 그들 모두가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데, 북파공작원은 1970년대까지 활동한 요원들이 대부분이 죽고, 살아서 귀환한 극소수의 부상자와 건강하지만 과거의 전력이 원인이 되어 사회생활이 결코 순탄치 못해 소외 계층으로 전락한 요원들이 이제 와서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길거리에서 시위를 펼치며 국가를 원망해야 되겠습니까?"다음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송환>에 나오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