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사정전임금이 편전으로 사용하던 전각으로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과 함께 경복궁 남북 축 선상에 있으며 뒷문으로 나가면 임금의 침실 강녕전이다
이정근
"삼정승과 좌찬성이 입궐하였습니다.""들라 이르라."영의정 수양대군,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 좌찬성 이사철, 좌참찬 이계린이 입시하였다.
"전하께서 외롭고 적적하시므로 모두 왕비 맞아들이기를 원하오니 맞아들이소서.""맞아들이소서!""맞아들이소서!!"다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불가하다.""태종께서 '국상 3년 내에는 장가를 들지 못한다'는 법을 세우셨으나 이것은 평상시에 한 한 것입니다.""지키라고 만들어놓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슨 법이라 하겠습니까? 과인은 법을 지킬 것입니다.""지금 전하께서 처한 입장은 항상 있을 수 있는 상례(常例)가 아니오니 사사로운 법에 얽매여서는 아니 됩니다.""사사로운 법이라 하셨습니까?""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평화롭고 한가한 시대에 지키라고 만들어놓은 법은 좇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역도가 날뛰는 국난의 와중입니다.""태종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법 이전에 부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인간이 예를 벗어나면 축생과 다를 바 뭐가 있겠습니까? 과인은 법도 지키고 예도 따를 것 입니다.""옛사람이 말하기를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잡아 건진다'고 하였습니다. 형수의 손을 잡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나 물에 빠지면 손으로 끌어 잡아야 하니 이는 부득이하여 권도(權道)에 따른 것입니다.""과인은 권도보다 정도(正道)를 따를 것입니다."임금의 심중은 단호했다.
"청컨대 경중과 대소를 깊이 생각하셔서 옳은 길로 결단하소서.""돌아들 가시오." 임금의 결심은 완강했다. 수양과 신료들이 물러나왔다. 오전에 물러나온 수양이 오후에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정인지와 한확 등 조정 대신 외에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경녕군 이비, 부마 정종과 함께 입궐했다.
"오늘 아침에는 정부에서만 청하여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만 이번에는 육조의 재상과 종친 부마와 일등공신들이 모두 다 함께 청합니다. 윤허하소서."
머리가 하얀 종친들이 고개를 숙였다.
"불가하다."임금에게 가장 무서운 종친은 수양대군이고 가장 어려운 종친은 양녕대군이다. 왕위를 버린 그 위대함도 존경스러웠지만 나이 상으로도 참 어려운 존재였다. 임금 나이 12살. 양녕대군 59세. 직계 할아버지 세종의 형님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임금이 잠깐 흔들렸으나 중심을 잡았다.
"신들의 청은 전하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오라 국가의 대사입니다.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은 종사(宗社) 만세의 계책에 관계되는 것이오니 청컨대 경중을 생각하소서.""불가하다 하지 않았습니까.""윤허하지 않으시면 신 등은 물러갈 수 없사옵니다. 윤허를 얻은 뒤에야 물러가겠습니다.""윤허는 없습니다.""오늘의 청은 하루의 의논이 아니고 심사숙고한 뒤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오니 어찌 옳지 않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까? 모름지기 신 등의 청을 따르소서.""윤허는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임금의 단호함은 꺾을 수 없었다.
거목도 마지막 한 방에 쓰러진다대군청에 돌아온 수양이 한명회를 불렀다.
"자네의 의견이 묘안인 줄 알았는데 졸책 이었나 보네.""몇 번이나 했다고 그러십니까?""다섯 번 간택 후에 양녕대군을 모시고 들어갔는데도 어림없네.""거목도 마지막 한 방에 쓰러집니다. 아직 마지막 한 방이 주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 마지막 한 방이 언제 터지겠나?""찍다보면 터지게 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