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찬 장군 초상화
김상기
한말 유림의 태두였던 최익현은 "임병찬의 기우는 헌양하고, 목소리는 우레와 같으며, 눈빛은 번개와 같은 호랑이 눈이요. 눈썹이 천창을 떨치고, 위의는 출중하며, 언어는 항상 중용을 지키니 사람들이 우르렀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의병장 임병찬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또한 전북지역 한말 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되면서 의병운동 자체에 대한 평가마저 소홀히 다뤄지는 측면이 있음을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알게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동학운동과 얽힌 실타래 때문일 것이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3대 우두머리 중 한 명인 김개남 장군이 바로 임병찬의 밀고로 붙잡힌 것이다. 당연히 동학에서는 임병찬을 멀리하게 됐고, 동학이 대세인 정읍에서 임병찬의 의병은 제대로 된 평가조차 못 받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당시 임병찬은 그 공으로 조정에서 내린 무남영자령관과 임실군수라는 벼슬을 연이어 거부했다. 또한 최근에는 임병찬의 밀고가 나머지 동학도들을 구하기 위한 고육지계란 주장까지 나오면서 임병찬과 동학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임병찬 창의유적지가 있는 정읍시 산내면에서 '산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카페를 운영하며 지독한 지역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김현기(41)씨는 "동학과의 관계를 매듭짓지 않고서는 장군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1851년 2월 5일 생인 임병찬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4살에 아버지 밑에서 천자문과 추구(推句)를 배웠고, 5살 때에는 훈장 송영숙의 사숙에서 사자소학과 오언당서 등을 배웠다. 6살에는 집에 사숙을 차리고 조용성을 초빙해 배웠는데, 그는 하루에 자치통감을 30줄씩 외우고, 5언을 능히 지을 수 있었으며, 7살 때에는 통감을 하루에 200여 줄씩 배우고, 다음날에는 이를 모두 외우니 고을에서는 신동이라고 칭찬하였다. 8살 때에 고을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그의 재예를 짐작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