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두리반 투쟁 1주년 기념으로 인디밴드 '단편선'이 공연하고 있다.
구영식
철거농성은 사람의 길이 아니다김경민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는 우리나라의 재개발 사업이 무작정 돈만 좇는 부나비식 재개발 사업이라고 통탄한다. 재개발 사업에 전문 디벨로퍼(부동산을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는 총괄 부동산 개발업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돈이 되는 사업인가만 따질 뿐이라고 한다. 돈이 된다면 기존의 생명들은 알 바가 아니라는 것, 그 같은 사업방식에 그는 절망한다. <도시개발, 길을 잃다>에서 김 교수는 말한다.
"저소득층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가 새로운 중산층타운으로 바뀌는 것이 재개발 사업이다." 이 같은 개발 사업을 시청과 구청은 끝없이 조장한다. "구청 입장에서는 중산층이 들어옴으로써 주택 가격이 상승하고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어 자신의 수입인 세금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조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시의 22개 구가 뉴타운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다."시청과 구청의 조장과 방관, 돈에 눈먼 건설자본의 조급증, 돈에 휘둘려 물불을 안 가리고 폭력을 일로 삼는 철거업체의 깡패들, 구경꾼으로 전락한 경찰, 그 속에서 철거민들은 치를 떤다. 살아갈 길을 잃은 데다, 하도 억울하고 막막해서 무작정 농성의 길을 택하지만 그건 결코 사람의 길이 아니다. 가정은 파괴됐다. 아이들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눈물의 대상이 됐다.
농성장은 섬뜩하다. 언제 깡패들이 들이닥쳐 가공할 폭력을 일삼을지 몰라 살얼음판을 딛고 선 것만 같다. 농성장이 어떤 곳인지는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씨의 말을 빌면 더욱 실감난다.
"언제 경찰력이 투입될지 몰라 자다가 깨는 일이 허다했다. 선잠을 자다가 보통 새벽 5~6시에 눈을 떴다."김진숙씨의 말에서 '경찰력'을 '용역깡패'로 대체하면 철거농성장의 현주소가 된다.
2009년 12월 26일 새벽부터 서울 홍대 앞 칼국숫집 두리반은 결코 사람의 길이 아니라는 그 같은 철거농성을 시작했다. 졸지에 가정은 파괴됐고, 살길은 막혔다. 죽는 길밖에 없다면 한은 풀고 죽어야 할 게 아닌가. 모욕을 당해 욕스럽게 됐다면 그 분함이라도 알려야 할 게 아닌가. 오직 그 생각이었으니 철거농성의 승리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돈에 눈먼 막개발의 폐해에 대해 알렸다. 강자에겐 법이지만 약자에겐 살인도구일 뿐인 개발악법에 대해 알렸다. 악무한으로 치닫는 사회에 맞서자고 연대를 호소했다.
벗들과 동료작가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지역주민과 진보정당 사람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인디뮤지션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와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두리반은 놀라운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희망은 함께할 때 잡히고, 투쟁은 즐겁게 할 때 승리한다는 정석처럼 두리반은 넘치는 힘으로 즐겁게 굴러갔다.
한때 건설사는 전기를 끊어 연대의 고리를 끊고자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이 두리반과 함께했다. 건전지 촛불을 보내왔고, 태양광 발전기를 보내왔고,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에 의견광고까지 후원해 주었다. 두리반은 어두웠으나 더욱 열광적으로 공연했다. 함께하는 이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건설사는 농성을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마침내 대화를 시도했다. 폭력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해볼 수 없다고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두리반대책위원회는 대화에 응했다. 올 초부터 시작해 6월 초까지 무려 여섯 달 동안 협상 테이블에서 머리를 맞댔다. 협상 타결은 6월 8일에 이루어졌다. 두리반 농성을 시작한 지는 531일 만이고, 전기가 끊긴 지는 324일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