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 지난 여름 한 해수욕장에서 나와 아버지.
김정현
열 몇 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문을 들추어보기 시작한 어느 때부턴가 아버지라는 존재가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 화를 낼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어렵게만 느껴지던 아버지도 그냥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단 우리 아버지에게서만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서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해 온 남성들에 대한 묘한 호기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고 할까.
이를테면 명절 때마다, 차례와 성묘를 치르고 난 '아버지들'이 방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거나 거실에서 조용히 티브이를 보는 모습을 보며 '수컷들은 다 저런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틀에 박힌 성역할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들' 한켠으로, 잠시나마 찾아온 1년 중의 여유를 그렇게 조용히 만끽하는 지친 수컷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약간 신비스러운 구석도 있다. 설이나 추석 당일 저물녘에 그늘진 방에서 고요히 누워 있는 그들의 모습은 해가 갈수록 어떤 무게를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지금까지도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무게'를 느끼게끔 하는 사건이 있다. 내가 다섯 살이던 어느 밤, 어디선가 몹시도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 보았더니 아버지가 어머니 무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엉엉 울고 있었다. 정확히 어머니 무르팍에 아버지가 얼굴을 묻고 있었는지 혹은 마루에 혼자 엎어져 울고 있는 것을 어머니가 옆에서 달랬던 것인지, 혼동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정황상 그 사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있는 아버지는 지역 출신으로 전교조 지회를 만들어 활동했었다. 탈퇴하지 않으면 해고되는 상황에서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해직되지 않은 채 학교에 남았다. 술에 취한 채 눈물을 흘린 그 밤에도 아마 아버지는 해직교사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연고도 없는 젊은이들이 자기 고향에서 해직 교사가 되어 있는 모습을 학교에서 지켜보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답답함과 미안함으로 얼룩진 가슴이 그렇게 술김에 터져 나온 것이, 어린 내게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술을 먹으면 사람의 진심이 드러난다'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다. 술 먹고 실수하는 숱한 경우를 일러 '진심'이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근데 아버지의 경우에는 그 말이 어느 정도 맞을 때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의 그 사건도, 평소에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자기 자신을 놓아버린 드문 경우였기 때문에 뇌리에 남을 수 있었다. 지금도 아버지는 술김에 전화를 걸어 평소에는 언급하지 않았던 아들에 대한 불만이나 기대를 드러내곤 한다.
"지금 어디고? 술 한 잔 했다. 사람들 만나서 니 얘기 좀 했다."술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나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으시지만, 대충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자랑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형한테 전화를 걸어서 내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형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지가 너한테는 여러 가지로 맘에 안 드는 게 많은데, 나는 장가 안 간 것만 빼고 다 괜찮다고 하시더라. 킥킥."정작 아버지는 기억을 못한다고 하시니, 그걸 통해서 자식들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좋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들의 미래'라는 아버지...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