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네에서 바라본 마산 앞바다. 멀리 보이는 게 돝섬이다.(2008년 2월)
김대홍
출발지는 마산 시가지에서 남쪽 외곽에 있는 마산남부시외버스터미널이다. 여기서 남쪽 가포유원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출발부터 긴 오르막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길을 나서는 게 좋다. 가포유원지는 한 때 해수욕장이었으나 지금은 매립돼 그때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마산에 사는 사람이나 마산을 아는 사람은 코웃음 칠 지 모르지만 마산은 오랫동안 꽤 유명한 해수욕장 도시였다. 이른바 '물 좋은' 도시였단 말씀.
한 때 '가고픈 남쪽바다'였던 곳이 어느 순간 '똥물'이 떠다니는 최악의 바다로 변했으니 참 기막힐 일이다. 지금도 최하등급인 3급수에 머물고 있으니, 한 번 나빠진 환경을 되돌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쨌든 시내에 있던 해수욕장은 점점 밖으로 밀려나다 마침내 사라졌으니, 영욕의 역사다. 마산 해수욕장 역사를 쭉 거슬러 올라가면 월포해수욕장이 첫자리다. 해방 전 월포해수욕장은 조선 각지에서 피서객이 몰려드는 전국구 휴양지였다.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남조선지방에서도 물이 맑고 모래가 히여 풍광이 명미하기로 이름이 높아 각 여관업자들은 이때 한목을 보게 된다고 한다."- 동아일보(1934년 7월 5일)
문제는 그 놈의 사람. 사람이 몰려드니 집이 필요하고, 일자리가 있어야 하니 공장을 지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만만한 게 바다고 갯벌이다. 해서 월포해수욕장도 매립된다. 1938년 폐장되고 인근 다른 곳에 해수욕장을 만든다. 이후 해수욕장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난다.
그 뒤엔 가포해수욕장이다. 시내 중심가에서 5-6km 정도 떨어졌다. 가포해수욕장 또한 경상남도 사람들에게 꽤 인기가 높았다. 1971년 8월 첫 주말 강원 경포대에 3만1500명, 속리산에 5000명, 제주함덕에 1만5000명이 찾았을 때 가포엔 5만 명이 찾았다. 1964년 7월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나타나 해수욕객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허나 환경보존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오로지 공장 가동이 최우선이던 시절이 문제였다. 1971년 마산 앞바다를 접한 곳에 마산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섰다. 1974년엔 멀지 않은 곳에 창원기계공단이 들어섰다. 내륙 깊숙이 들어와 물이 잔잔한 마산 앞바다였다. 공장에서 내뱉는 폐수는 고스란히 마산만에 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썩기 시작하고 1979년 수산청은 마산만에서 각종 어패류 채취를 금지한다는 조치를 내린다. 가포해수욕장은 이보다 훨씬 전인 1976년 4월 폐장했다. 사람은 못 들어가게 막고, 나머지 생물들은 그대로 죽은 바다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