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하가 명명한 죽계구곡
이상기
안축의 '죽계별곡'에 근거해, 죽계구곡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다. 죽계구곡에 관한 내용이 <죽계지>와 <흥주지>에 나온다. 그런데 그 후 영조 때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申弼夏)에 의해 죽계구곡의 명칭이 바뀐다. 그리고 구곡의 상하가 뒤바뀌고 전체 길이도 짧아진다. <순흥지(順興誌)>의 기록에 따르면, 신필하가 명명한 죽계구곡은 초암사 위쪽에 금당반석(金堂盤石)을 1곡으로 하고, 내려가면서 순서를 정해 하류의 이화동을 9곡으로 하였다.
이때 이후 죽계구곡에 큰 혼란이 생겨났다. 누구의 것을 따라야 하는지도 문제지만, 구곡의 위치 비정에도 문제가 생겼다. 특히 문제가 되는 곳이 제5곡 목욕담, 제6곡 청련동애, 제7곡 용추비폭이다. 이화동 상류에서 목욕할 정도의 못을 찾기 어렵고, 폭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소백산 자락길 탐사에서 죽계구곡의 제5, 6, 7곡을 찾는 걸 포기했다.
정확히는 찾는 걸 포기한 게 아니고 위치 비정을 포기했다고 하는 게 맞다 그 동안 자연이 너무 변했고, 또한 이곳에 사람들이 들어와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이 너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암사로 올라가는 도로를 내면서 하천이 정말 많이 훼손되었다. 결국 사람들의 짓이다. 그렇지만 사람들만 나무랄 수도 없다. 사는 게 먼저니까.
배점리에서 만난 배순 정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