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성이징옥 사건으로 공포에 휩싸인 종성
이정근
선위별감 박대손이 이끄는 조사단이 한성을 떠났다는 소식이 함길도에 알려지자 길주에 찬바람이 불고 종성에 삭풍이 몰아쳤다. 한 때는 육진의 최전방 기지로 활기가 넘쳤던 고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종성(鍾城)은 북쪽에 동건산이 있어 종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두만강 건너 야인들은 종(鍾)을 동건(童巾)이라 부른다. 세종 이전까지 이곳을 점유했던 야인들이 동건산이라 불렀고 그것이 육진 개척 후 종성이라는 지명으로 굳었다.
엎어놓은 종(鍾)처럼 생겼다 하여 동건산(童巾山)이라는 이름을 얻은 산을 품고 있어서 그럴까? 종성에 날아든 소문은 종소리처럼 빠르게 전파되었다. '누구누구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그럴듯하게 덧칠된 명단까지 나돌았다. 누구는 죽을 것이고 누구는 살 것이라는 종성 판 살생부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자발적으로 협조한 자는 목이 달아날 게 불 보듯 뻔한 일이고, 겁박에 못 이겨 부역했다 해도 증거를 대기가 매우 곤란한 일이다. 조사관이 아니라면 아니고 기다면 기다. 매에 장사 없다. 종성 백성들은 살았다 해도 산 숨이 아니고 숨을 쉬고 있다고 해도 자기 목숨이 아니었다.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종성 벌족 맹(孟)씨와 변(邊)씨, 염(廉)씨는 자신들의 문중에서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위하여 매일같이 회의를 소집했지만 뾰쪽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데 누가 누구를 빼줄 수 있단 말인가.
평소에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람은 물귀신이 무서웠다죽을 것만 같은 사람은 억울해서 혼자 죽지 못하겠다며 저승길에 같이 갈 길동무 찾기에 혈안이 되었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은 이웃이 있는 사람은 물귀신 작전에 걸려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혁명에 들떠 있던 종성은 그 열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어붙었고 공포가 읍성을 짓눌렀다.
모을고가동(毛乙古家洞)에 사는 장덕길은 불안에 떨다 식솔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야반도주한 자는 덕길이뿐만이 아니다. 이 동네 저 동네 할 것 없이 자고나면 사라지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이 어느 날 갑자기 대박이 난 것이다.
칠복이는 창고문을 열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 켕겨 강물에 투신했다. 야인들은 일곱(七)을 나단이라 부른다. 나단산(羅端山)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곱 가지 복을 내려 달라는 의미로 그의 아버지가 칠복이라 이름 지어 주었는데 칠복은커녕 한 개도 받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소고가동(所古家洞)에 사는 황숭찬은 겁에 질려 목을 맸다. 동량개동가월변동(同良介同家越邊洞)에 사는 손달식은 헛소리를 하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민심은 흉흉했고 바람은 살벌했다. 종성 가호(家戶) 9백 호 중, 삼백호 이상과 읍민 2만 1815명 중 절반 이상이 죽을 것이라는 괴소문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평화로웠던 변방 마을 종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맞을 매라면 먼저 맞는 게 좋아서일까? '선위별감이 한성을 떠난 지 언제인데 아직까지 안 오느냐?'는 웃지 못할 불평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툭하면 터질 것 같은 험악한 공기가 종성 하늘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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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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