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뒷편에 미국 아마존 서점, 일본 고서점, 신촌 고서점 등에서 찾아낸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모임 교재의 귀한 참고서적들이 꽂혀있다.
노동세상
― 통일운동, 노동운동을 두루 거쳤는데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어요. 해방이 되자마자 마을 전신주에 삐라들이 붙는 거야. 일제 때 쓰던 교과서를 찢어서 거기다가 붓글씨로 써서 붙였는데 구호가 '경자유전(耕者有田, 직접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소유한다)', '땅을 농민에게!' 이런 거야. 그걸 보면서 '누가 저걸 써 붙였을까' 궁금하더라고. 지식 있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며칠 지나니까 우리 동네에서 소작농이나 머슴 하던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죽창을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동네를 행진해. 또 몇 달 뒤엔 이들이 쫓기기 시작하면서 산에서 봉화가 올라. 그리고선 토벌대에 잡혀 내려와서 지서에 끌려가 반죽음을 당해서 경찰서로 실려가더라고. 지식 있는 사람도, 힘 있는 사람들도 아닌데 '경자유전, 땅을 농민에게'를 주장하다가 잡혀서 반죽임을 당하는 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 그게 뭘까 계속 궁금하더라고. 이 질문이 끝까지 가고 있는 거지."
'물음'을 떠올려야 해답에 접근할 수 있다며 학습과 토론을 강조하는 그다. 인생의 좌표에도 물음표가 계속 따랐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반도가 바로 38선으로 나뉘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한국전쟁, 박정희 정권 등을 지나면서 여전히 그에겐 '가난한 백성들이 그리는 세상은 뭘까?'라는 물음이 뒤따랐다. 그 역시도 일제 때 만주에서 트럭운전수를 하던 아버지, 일찍 여읜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를 모시고 굶주리며 살던 가난한 백성이었다.
―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중학교 때는 엄청 깡패짓을 많이 했어. 남녀공학이었는데 대대장을 하니까 줄도 세워야 하고 애들이 말을 안 들으면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지. 연애하지 말라고 충고도 하고…. 그게 다 깡패짓이지 뭐. 고등학교는 부산고에 갔는데 학교 공부는 안 하고 후배들하고 일종의 독서 서클을 만들어서 책만 열심히 봤지. '암장'이라는 독서서클은 시골에서 부산사범학교로 온 친구들과 함께 했는데, 이들이 나중에 인민혁명당(인혁당),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거나 사형을 당하기도 했어요."
― 20대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활동을 했는데 민자통은 어떤 조직이었나."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 때 4.19를 맞았어요. 4.19 이후에 변혁을 고민하는 민족민주청년동맹이라는 청년단체가 만들어지는데 내가 지금의 사무총장 격인 간사장을 맡았지. 그런데 청년운동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혁신정당, 개인, 청년단체 등 여러 부문이 함께 하는 통일전선운동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 참가하게 되었지요. 민자통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하자'고 주장하면서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포괄하는 통일전선체를 지향했어요."
― 4·19 이후 국민이 희망에 부풀었을 것 같은데?"독재정권이 무너졌으니까 희망이 있긴 했지. 그런데 바로 그해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했어요. 진보세력은 거물정치인들 몇 명 빼고 거의 안 됐고. 민주당이 내세운 구호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어. 국민들도 '민주당이 뭐 좀 해주겠지' 했는데 뽑아줘도 별로 바뀌는 게 없었던 거야.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61년 5월 13일에 민자통 주최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군중대회를 열었어요. 대회는 2시부터 시작인데 12시부터 서민들이 엄청 와. 점심을 못 먹는 사람들인 게지. 주최 측에선 5만 명이라고 했어요. 원래 시위계획이 안 잡혀 있었는데 정부에서 깡패를 동원해 운동장 입구를 막으니까 사람들이 막 뛰쳐나갔어. 거리로 나서는데 동대문시장에서 노점하는 상인들,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 구호도 넣어 달라'고 해. '대책 없는 판자촌 철거 반대' '노점상 권리 보장' 같은 요구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지."
민자통은 5월 16일 전주, 17일 대구까지 군중대회를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5월 16일, 박정희 등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탓이다. 군사독재정권이 시작되자 민자통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청년단체들은 비공식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우리로서는 합법적인 활동을 하다가 길이 막혀서 비공개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데 박정희 정권은 '국가 전복을 위한 전위정당'이라고 사건을 부풀렸지."1964년에 일어난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다.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는 박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시위가 연일 일어나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공안부 담당 검사들은 구속자들에 대한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기소장에 서명을 거부했다. 또한 1965년 1월, 재판부는 선고공판에서 도예종, 양춘우 2명을 제외한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4달 후 항소심 재판부는 "북한의 통일방안에 동조했다"는 찬양·고무죄로 도예종에게 징역 3년, 박현채 등 5명에게 실형·법정 구속, 김금수 등 6명에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10년 뒤, 인혁당 사건은 똑같이 되풀이된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해지자 박 정권은 다시 그 배후에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가 있다고 발표한다. 1975년 4월 9일 재판부는 도예종, 서도원, 이수병, 여정남 등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선고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하는 '사법살인'을 단행한다.
2005년 국정원과거사위는 1·2차 인혁당 사건이 모두 고문 등에 의한 조작사건이었음을 발표하고, 2008년 법원은 사형수 8인에 대한 국가배상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50년 가까이 관련자들에겐 '간첩'이란 붉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직장길이 막혔지. 공식적인 요시찰 인물이어서 거의 24시간 감시하다시피 했어. 동네 통장이나 복덕방에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왔으니까. 장사를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어."1차 인혁당에 연루돼 구속됐던 김 이사장은 제재소, 꽃 도매상을 하기도 했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계속 허덕대게 되더라고."'간첩'이란 꼬리표, 24시간 감시에 시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