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김경승의 작업실왼쪽에 보이는 작품이 제 21회 조선미전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여명>
친일인명사전
그는 1942년 6월 3일자 <매일신보>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외에도 여러 친일 행적이 소개되어 있었다. 해방 후, 이런 친일 행위들이 문제가 되어 미술가들이 만든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국전 창설위원이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중등미술교과서를 발간함으로써 해방 후 미술교육의 골격을 세웠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안중근 의사 동상, 김구 선생 동상 등 여러 항일 인물들의 인물상을 제작했으며, 4·19 묘지의 여러 조형물도 제작했다.
맥아더 장군상을 제작한 이가 바로 친일인명사전에 실려있는 이 표천 김경승이었다. 보고서에는 맥아더 장군상을 포함하여 김경승의 작품 15점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것들 모두가 친일파의 작품이라는 설명도 없이 근대 문화재가 되는 것일까?
보고서의 68쪽에 있는 작품 설명에 의하면,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상>은 1957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해 이기붕, 변영태, 조병옥 등 각계대표 50여 명이 '맥아더 장군 동상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들이 성금을 내어 제작한, 1950년대의 대표적인 기념조각이라고 한다. 맥아더 장군이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막아낸 '자유의 사도'로 전후 한국민들에게 높이 숭상됐는데, 이에 이 동상을 세워 감사의 마음을 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상은 철거하자는 주장과 사수하자는 주장이 부딪히며, 2005년 보수와 진보 사이에 큰 충돌을 불러왔다. 이런 사실을 의식해서인지 보고서에서도 "1980년대 이후, 분단에 대한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다양해지면서 사회적 갈등이 부딪히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 결론은 "<더글라스 맥아더 동상>은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한국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인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였다.
맥아더 장군은 어떤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