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의 어좌.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화단지 안에 있다.
김종성
의자왕은 전쟁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데뷔 이듬해인 의자왕 2년 7월에는 직접 말에 올라타 1개월 사이에 40여 개의 신라 성(城)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성 하나는 보통 읍의 크기와 비슷했고, 읍 하나를 점령하면 주변 지역까지 '패키지'로 차지했다. 40여 개의 성을 한 번에 빼앗았으니,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다음 달, 의자왕은 전략적 요충지인 신라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 일부)을 점령했다. 또 의자왕 3년 11월에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당항성(지금의 경기 화성 일부)을 빼앗았다. 당항성은 신라와 당나라를 잇는 루트였다.
의자왕은 의자왕 5년 5월에 신라의 7개 성을, 8년 3월에는 10개 성을, 9년 8월에는 7개 성을 함락했다. 15년 8월에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3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얼마 되지 않는 신라 국토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의자왕은 신라를 압박하고 들어갔다.
물론 의자왕 4년 9월에 신라 김유신 장군에게 7개 성을 빼앗긴 것을 포함해서, 신라에 몇 차례 패전한 적은 있다. 하지만, 김유신의 활약이 판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의자왕 16년 이전의 백제는 신라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과시했다. 의자왕 11년에 당나라 고종이 "빼앗은 영토를 신라에 돌려주라"고 요구한 사실은, 의자왕의 대약진에 당나라도 당황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의자왕은 '창'뿐만 아니라 '입'으로도 성과를 거두었다. 외교 분야에서도 대성공을 이룩한 것이다. 의자왕 3년 11월에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빼앗고 13년 8월에는 왜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15년 8월에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30여 개의 신라 성을 빼앗았다. 고구려-말갈-백제-왜국으로 구성된 세로축 동맹으로 신라-당나라의 가로축 동맹에 맞선 것이다.
수나라에 이어 중국을 재통일한 당나라 초기의 외교는 한마디로 거만함 그 자체였다. 당나라는 이웃나라들에게 자국의 행정구역(도호부·도독부)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자기 나라 외에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만함의 표시였다.
의자왕은 그렇게 사는 것이 싫었다. 그는 '당나라의 51번째 주'가 되어 찌질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말갈·왜국과 더불어 당나라의 '나쁜 외교'에 반기를 치켜든 것이다.
의자왕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나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었다. 외교 방면에서도 그는 시대의 진보적 흐름을 선도하는 국제적 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