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1979년 12월 18일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9회 결심공판.
사실심리가 모두 끝나고 변호인단의 변론과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을 듣는 차례다. 변호인들은 김재규의 행동이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권 행사와 국민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임을 들어 한결같이 사형만은 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동일 변호사 : "본건은 역사상 그 유례를 굳이 찾아본다면 시저와 브루투스의 예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대통령과 가까웠던 한 나라의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입니다."태윤기 변호사 : "옛날 로마에서 절대 권력을 가졌던 시저가 부하로부터 칼에 찔려 쓰러질 때, '너마저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브루투스는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한다. 속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사죄할 뿐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사감(私憾)에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바로 로마의 공화정을 회생시키기 위해서 절대 권력자를 제거했다는 뜻일 겁니다." '박정희 - 김재규 관계'를 로마시대의 '카이사르- 브루투스'로 비견하는 것은 꼭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만큼 사건 자체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이었다. 브루투스가 로마 공화제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은인인 카이사르를 찌른 것처럼, 김재규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박정희를 쏘았다는 변론이었다.
여인과의 사랑에선 물불 안 가린 호색한 카이사르
기원전 44년 3월 15일 10시, 로마 시내의 폼페이우스 대회랑에서 600여 명의 귀족들이 참석하는 원로원 회의가 열리기로 공지됐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55년 전의 이야기다.
카이사르는 사흘 뒤 다시 먼 원정길에 나설 예정이었다. 로마의 3월 날씨는 그때도 변덕스럽고 거칠었던 모양이다. 3월 14일 밤부터 15일 새벽까지 폭풍우가 거리를 휩쓸었다. 평소 볼 수 없던 엄청난 규모의 새떼가 날아들기도 했다. 게다가 아내 칼푸르니아는 아침 일찍 이상한 악몽을 이야기하며 꺼림칙하다는 표정이었다.
당시 로마에는 카이사르의 애인인 클레오파트라가 와 있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원정 온 카이사르를 사랑으로 사로잡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오늘날까지도 미녀의 대명사로 불리듯 그녀는 절세의 아름다움을 타고 난데다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로서 권력의지도 남달랐다. 마치 가시 있는 장미꽃이라고나 할까, 정복왕 카이사르에게는 좋은 연애 상대였던 셈이다.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국내외 반대세력과 분란을 모두 평정한 뒤, 로마에 돌아와 절대 권력자로서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도 이때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3살된 아들 카이사리온(훗날 이집트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15세)과 함께 로마로 들어왔다. 이것 역시 로마 귀족들 사이에 카이사르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조성했다. 카이사르는 전쟁을 비롯한 일에는 냉정하고 합리적이었지만, 여인과의 사랑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호색한이었다.
모처럼 아침식사를 함께 한 아내가 불길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이 카이사르의 일정을 변경시키지는 못했다. 그런 전조들은 평생을 험한 전쟁터에서 보낸 그에게 별 부담감으로 작용하지 못한 셈이다. 카이사르에게는 언제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승전고가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관용, 결국 본인의 비운을 재촉하다그날 관저에서 원로원 회의장까지 카이사르를 수행한 사람은 그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 장군인 데키무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20대부터 갈리아 등 수많은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한 충성스런 장수였다. 카이사르는 그를 트란살피나갈리아의 총독으로 중용하기도 했다.
원로원 회의장은 격론이 벌어지기 일쑤여서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금지됐다. 그러니까 카이사르 파는 모두 맨 몸이었고 암살 모의자들만 옷 속에 단도를 숨겨 입장한 것이다. 암살파는 카이사르의 측근들 중 안토니우스의 완력이 걱정이었다. 비록 무기를 안 가졌다고 해도 안토니우스는 힘이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안토니우스를 회의에 참석하지 않도록 지략을 써 다른 곳으로 유인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의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인사도 나누고 어수선할 때, 수십 명의 원로원 암살자들이 카이사르를 에워쌌다. 그들은 순식간에 단검을 꺼내 들어 카이사르를 찔러 댔다. 너무도 긴장되고 서두른 나머지 자기들끼리 찌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그들 중 두 사람의 브루투스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사람은 아침부터 수행해 온 데키무스 브루투스였으나, 다른 한 사람은 마르쿠스 브루투스였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미망인으로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다. 카이사르는 애인의 부탁으로 마르쿠스를 관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부르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항하는 적의 진영으로 들어간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모두 평정한 뒤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용서했으며, 계속해서 요직에 기용했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관용이었으나 자신의 비운을 재촉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제2의 상속자인 브루투스, 카이사르를 찌르다카이사르는 마지막 순간에 탄식했다.
"오, 브루투스, 너 마저 …!" 카이사르는 모두 23곳이나 칼에 찔렸다. 그는 비참한 최후를 감추려는 듯 붉은 망토로 상체와 얼굴까지 휘감은 채 쓰러졌다.
훗날 역사가들 사이에 카이사르의 탄식이 어떤 브루투스를 두고 외친 말인지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배신감을 토로한 것임은 분명하고, 그렇다면 두 부루투스 모두 이에 해당된다. 이 논란에 대해서는 카이사르의 유언장 공개가 해답이 될 것이다. 카이사르는 죽기 6개월 전 써 둔 유언장에 제1의 상속자로 옥타비아누스를, 그리고 제2의 상속자로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지정했다. 유언장이 공개된 장소에서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까 카이사르가 충격적으로 느낀 배신감은 자신이 제2의 상속자로까지 지정해 놓은 테키무스 부루투스로 향했다는 이야기다.
카이사르의 원망에 대한 브루투스의 답변과 해명은 그 다음날 카이사르의 관저가 있던 시내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브루투스는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카이사르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그를 죽였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로마인은 모두 그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트렸다. 속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사죄할 뿐이다." "민주화 지연시키다간 80년 4, 5월께 국가적 혼란 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