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남 목사
당진시대 우현선
'대전충남 민주화운동의 원로, 통일운동가, 지역 인권운동의 선구자'그의 이름 앞에 붙는 접두사다. 이명남 목사(71, 당진장로교회 목사). 그가 오는 11일 목사 은퇴식(오전 11시 당진장로교회)을 갖는다. 이같은 소식에 곳곳에서 '벌써?'라는 의문부호가 찍혔다. 지역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는 언제나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이 목사를 지난달 31일 당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대전 토박이인 이 목사는 당진에서만 31년간 목회활동을 했다. 첫 목회지인 충북 옥천 동이교회(동이면), 충북 진천군 문백교회(문백면), 전북 임실군 성수교회(성수면)는 당진에 터를 잡기 전 그가 거쳐 간 곳이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독재권력에 날선 비판을 가했다. 1980년대 초 당진에 정착하자마자 대전충남지역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1984년에는 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을 맡았고, 85년에는 충남민주화운동본부 상임의장을 맡는 등 저항운동의 선두에 섰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78년인가 임실군에서 목회를 하면서부터야. 그때 농촌은 피폐화된 데다 이농현상이 심각했어. 농촌과 농민문제를 들여다보다 보니 가톨릭농민회와도 연관을 갖게 됐고…." 농촌 목회하다가 '농촌문제' 접하고 사회운동 6월 항쟁으로 전국이 들끓었던 1987년에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상임의장을 맡아 30여 명의 다른 목사들과 서울 서대문에서 13일간 삭발 단식농성을 벌였다.
"아마 목회자 수십여 명이 집단으로 삭발단식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 아니었나 싶어. 그때 <조선일보> 네컷 만화 '고바우영감'에 '목사를 만나려면 교회에 가지 말고 이발소로 가라'는 내용이 실렸어. 죄 삭발하러 갔다고 비꼬는 내용이었지만 그만큼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
정의평화실천협의회 일을 주도하는 동안 여러 일을 벌였다. 민정당사는 물론 전경련 사무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대전에서도 대학생과 청년단체들이 시위를 많이 벌였어. 그러다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많았지. 목사가 앞장을 서니까 학생들 연행되는 걸 막는 효과가 있었어. 그러니 안 나설 수가 있어? 연행된 학생들 경찰서에 가서 데리고 나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 시대가,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지."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매진하던 그는 일찌감치 통일운동에 눈을 돌렸다. 가택연금과 집회불허도 뒤따랐다. 당시 그의 앞에 붙은 수식어는 '운동권 목사' '빨갱이 목사'였다.
"남북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도, 인권도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어. 깨달은 이상 통일운동을 안할 수 있나. 한국교회가 통일운동 물꼬를 튼 82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어"반독재 운동에서 인권·통일운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