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숭겸을 기리는 동상과 비석
정만진
대구 출신은 아니지만 왕건(877~943)과 신숭겸(?~927)은 대구에 이름을 남겼다. 927년의 동수대전 때 견훤군에 대패하여 죽고(신숭겸) 도망친(왕건) 결과이다. 그 대표적 유적지가 바로 동구 지묘동 파군재 삼거리 뒤편, 왕산 아래의 '신숭겸장군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1호)이다.
지묘동 신숭겸장군 유적지에는 '신숭겸 장군이 이곳에서 순절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 있다. 그리고 평광동 골짜기인 시량리 끝자락에 가면 사과밭 뒤 산비탈에 그의 유허비도 남아 있다. 시량리 복판에는 신숭겸 장군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근래 중건된 모영재도 있다.
동수(동화사)대전이 남긴 신숭겸장군유적지 일대의 '왕건' 관련 지명들 |
왕산 : '왕'건이 넘어서 도망을 친 '산' 지묘동 :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왕인 척하는 절'묘'한 '지'를 내어 왕건을 살린 마을[洞] 독좌암 :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왕건이 넋을 잃고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岩] 독암서당 : 독좌암 인근에 세워진 서당 파군재 : 견훤군이 왕건군(軍)을 부순[破] 재(고개) 시량리 : 동네[里]사람은 왕(王)을 사라졌다[失]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로동 : 전쟁통에 건장한 사람[老]들은 볼 수 없고[不] 아이들만 남은 마을[洞] 안심 : 왕건이 도망을 치다가 멀리 온 끝에 마음[心]을 놓은[安] 곳 반야월 : 안심에 닿았을 때는 달[月]이 반(半)쯤 뜬 밤[夜]이었다. 무태 : 게으른[怠] 사람이 없는[無] 마을, 또는 군사들이 게을러서는[怠] 안 된다[無] 연경동 : 선비들이 경(經)전을 열심히 공부하고[硏] 있는 마을[洞] 도덕산 : 연경동 바로 뒤에 있다고 해서 도덕(道德)산이라는 이름을 얻음 살내 : 전쟁을 하느라 화'살'이 '내'(강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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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독좌암, 독암서당, 불로동, 반야월, 안심 등 대구의 동구 지역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왕건은 앞산에도 여러 지명을 만들어내었다. 그가 숨어지냈던 안일암과 앞산 정상부 턱밑의 왕굴, 그리고 은적사와 또 다른 왕굴,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성주 방향으로 탈출하기 이전에 잠시 들렀던 임휴사 등이 바로 그곳이다.
앞산에 남은 왕건 관련 지명들 |
안일암 : 왕건이 '안'전하고 편하게[逸] 숨어 지낸 '암'자 왕굴 : '왕'건이 숨어 지냈던 동'굴' 은적사 : 왕건이 숨어[隱] 지낸 흔'적'이 남은 '사'찰 임휴사 : 왕건이 머물면서[臨] 쉰[休]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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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왕건과 신숭겸은 전통적 의미에서는 '대구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대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가족과 함께 거주하지도 않았고, 무덤을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대구 사람'이다. 대구에 '큰'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왕건이 남긴 자취를 순서대로 따라가며 걸어보는 일은 충분히 '역사' 여행이 된다. 이순신이 남해 바닷가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곳에 무덤을 남기지도 않았지만, '이순신' 하면 한산도가 연상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상남도가 이순신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전하여 관광상품화 한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탓할 것인가.
역사 속 '대구의 인물', 왕건·신숭겸·박팽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