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승만에게 져서 이렇게 된 것인데..."

조봉암, 인혁당, 오휘웅, 데이비스 그리고 정씨... 사형, 그 억울함 다시는 없어야

등록 2011.10.29 10:14수정 2011.10.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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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가족이 다 잘 알아서 하겠으니 별말이야 있겠소. 결국 이승만에게 져서 이렇게 된 것인데… 다만 한마디 남겨놓고 싶은 게 있소. 이 나라에서 정치투쟁을 하다가 지면 이렇게 될  줄 짐작 못한 바 아니나… 그 희생으로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오." - 1959년 죽산 조봉암 선생 마지막 유언

장면 둘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밝힐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하느님이 아실 겁니다. 죽은 후에나마 이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가고 싶습니다. 목사님 도와주세요." - 1979년 사형수 오휘웅씨 마지막 유언 

장면 셋

서도원(이하 당시 나이 52.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김용원(39. 경기여고 교사), 이수병(38. 일어학원 강사), 우홍선(45.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송상진(46. 양봉업), 여정남(30. 전 경북대 학생회장), 하재완(43. 건축업), 도예종(50. 삼화토건 회장) 사형판결 18시간 후 사형집행 -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장면 넷


"나는 결백하다", "나는 총을 갖고 있다 않았다",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있기를 소원한다." - 9월 21일 미국 조지아주 잭슨시 흑인 사형수 트로이 데이비스 유언

장면 다섯


1972년 춘천에서 파출소장의 초등학생 딸을 강간한 뒤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간 옥살이를 하다 모범수로 가석방됐던 정아무개(77)씨. 재심 재판을 거쳐 39년 만에 누명을 벗어.

다섯 장면 중 네 장면은 사형수로 복역하다 사형집행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한 명은 다행히 사형선고를 받지 않아 15년 복역 후, 39년만에 누명을 벗었습니다. 만약 정씨도 사형을 당했다면 억울한 누명을 벗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죽산 52년만의 무죄, 하지만 생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죽산 조봉암 선생은 1959년 독재자 이승만에 의해 정치살해를 당했습니다. 죽산 선생은 한 때 이승만 정권하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 1956년 5월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맞붙었습니다. 1956년에는  216만여 표(30%)를 얻어 500여 만표를 얻은 이승만을 턱밑까지 추격했었습니다. 그 때 "선거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게 화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죽산 선생을 1958년 1월 ▲ 체포된 남파간첩 박정호 등과의 접선 ▲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서 파견한 정우갑과의 밀회 ▲ 북한의 조국통일구국투쟁위원회 김약수에게 밀사를 보내 평화통일추진을 협의한 사실 ▲ 북한노동당이 동양통신 외신기자이자 진보당 비밀당원인 정대영을 통해 진보당에 대한 강평서를 보낸 사실 따위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하지만 같은 7월 1심 재판부(재판장 유병진)는 간첩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간첩이 아니었기에 당연한 판결입니다. 하지만 독재자 이승만은 분노했습니다.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이 안 된다. 그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 - 2011.01.20 <한겨레> 이승만, 공권력 총동원 '정적 죽이기'

결국 2심 재판부와 대법원은 간첩죄를 적용해 사형을 판결하고 이승만은 그를 1959년 7월 31일 죽였습니다. '이승만-경찰-육군특무대-검찰'이 합작해 죽산 선생을 '정치살해'했습니다.

올해 1월 사법부가 조봉암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봉암 선생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 때 사형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승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였을 것이지만 법의 이름으로 죽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휘웅 "나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

둘째 장면 오휘웅 사건은 우리나라 사형제 폐지 논란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희웅씨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판' 가능성입니다. 지금은 극우논객이 되어 사상검증에 힘을 바치는 전 월간조선 대표 조갑제씨가 펴낸 <사형수 오휘웅>(한길사 펴냄)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오휘웅 사건은 1974년 12월30일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피해자는 정아무개씨와 두 자녀이고, 피의자는 정씨 아내 두이분씨와 내연남인 오휘웅씨입니다. 두이분씨는 내연남 오휘웅씨에게 살인을 교사(敎唆)했다고 자백했습니다. 이 자백은 사형선고와 집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씨는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고 범행을 부인했지만 사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1979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남긴 유언 "돈이 없어 죽는다"며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고 마지막까지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가장 결정적 증거이자, 증인이었던 두이분씨는 교도소에서 자살했습니다. 오휘웅은 사형으로 두이분은 자살해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오휘웅씨 말이 사실이라면 가장 억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박정희, 사형제 없었다면 인혁당 8명 18시간만에 죽이지 못해

만약 1975년 사형제가 없었다면 아무리 박정희라고 해도 인혁당 8명을 사법살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박정희에게 사형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하는,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데이비스 "나는 결백한, 억울한 희생자"

넷째 장면은 1989년 경찰관을 총으로 쏴 죽인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지난 달 21일 사형을 당한 흑인 데이비스 이야기입니다. 데이비스는 처음부터 범행을 부인했고,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진범으로 지목했던 목격자 대부분이 진술을 번복했지만 사형판결은 번복되지 않았습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국제앰네스티 등이 사면을 요구해 집행이 연기되었지만 사형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달 24일 <세계일보>에 따르면, 데이비스는 마지막 최후 진술에서 "정의를 위한 투쟁은 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투쟁은 과거에 존재했던 억울한 희생자 트로이 데이비스와 앞으로 생겨날 미래의 트로이 데이비스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데이비스는 "정의를 위한 투쟁은 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바로 자신과 같은 억울한 '죽임'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이제 진범이 잡혀도 데이비스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사형제는 이처럼 누명을 벗어도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우리 중 한 명이 유죄 판결을 둘러싼 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당한다면 미국의 사형제도는 부당하고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사형제만은 미국은 후진국입니다.

살인범 39년만에 무죄, 만약 그가 사형을 당했다면

살인범으로 몰려 15년간 옥살이하고, 39년만에 누명을 벗은 정아무개씨. '모범수'로 가석방을 받았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통해 무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사형판결을 받고, 사형집행을 당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억울한 누명을 벗을 길은 영영 없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정적 죽산 선생을 죽였고,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했던 이들을 죽였습니다. 정치살해와 사법살인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물론 다시 살아돌아 올 수는 없습니다.

오휘웅과 데이비스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을 기회도 없습니다. 사법기관은 이제 진범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진범이 아니라면 가장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조갑제씨는 <사형수 오휘웅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승리한 진실은 절대적 진실은 아냐"

오휘웅 사건은 인간의 판단능력이 갖는 한계와 함께 인식능력의 한계도 보여준다.  진실이란 말은 좋지만, 인간이 과연 진실을 입증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사건엔 개관적 진실이 없다. 주관적 진실만 있을 뿐이다. 오 씨가 주장한 진실과 판사가 인식한 진실은 정반대였고, 판사 쪽의 진실이 승리했다. 그러나 승리한 진실이 객관적인, 즉 절대적 진실이 아님은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오휘웅이 주장한 진실과 판사가 인식한 진실은 정반대였고, 판사 쪽의 진실이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왜 오휘웅 진실은 졌고, 판사 쪽의 진실은 승리했을까요? 판사의 인식에 오류는 없었을까요? 그 오류가 오판으로 이어졌다면 오휘웅씨는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승리한 진실이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판사라는 '권력'때문에 오휘웅 진실이 패했다면 사형제가 더더욱 폐지되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더 당한다면 오판과 더불어 억울함은 배가됩니다.

사형수 초졸은 40명, 대졸자는 없어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국민일보>가 지난 2006년 2월 19일 '[사형수 63인 리포트] (3) 범행에 이르기까지…87년이후 형집행된 101명' 제목 기사에서 2001년 순천대 법정학부 강사였던 한용씨 논문 '우리나라 사형집행 현황과 사형제도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을 인용해 보도했는데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70.3%에 이르는 71명이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농부(5명), 운전사(5명), 중소 상인(4명) 등 대부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다. 회사원 3명, 학생 2명도 포함돼 있다. 평균 학력은 본보 조사에서와 같이 중졸 수준이었다. 초졸이 40명으로 가장 많고 중졸(30명), 고졸(25명), 무학(6명)이었으며 대졸자는 없었다.

초등졸과 무학이 46%를 차지하고, '대졸자'가 없다는 기사 내용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배우지 못한 이들이 자기 변호에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한 것은 분명합니다. 배우지 못한 것이 또 다른 억울함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조갑제씨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맺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나는 취재가 잘 안 풀려 답답해질 때마다, 가장 완벽한 증거인멸은 사형집행이라는 말의 뜻을 실감했다. "오 씨가 살아 있다면 이 대목의 이 의문점을 풀어줄 텐데…"하고 안타까워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 씨는 그의 죽음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시켜주었다. 생각해보면, 한 인간이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무고함을 증거할 수 있는 사회는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 형장에서 진실이 드러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형제 #조봉암 #인혁당 #오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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