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강녕전의 내부. 이곳은 왕의 침전이다.
김종성
동아시아의 전통 예법에서는 아랫사람의 의무만 강조하지 않았다. 윗사람의 의무도 강력하게 요구했다. <논어> '안연' 편에 따르면, 제나라 경공(景公)이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군주는 군주답게 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하는 것"(君君臣臣, 父父子子)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시아버지에게는 시아버지다움이 요구되었다. 시아버지가 시아버지다움을 잃고 며느리의 '물건' 즉 며느리의 궁녀를 범하는 것은 며느리를 범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며느리의 궁녀를 탐하는 것은, 아들의 배우자인 양귀비를 가로챈 당나라 현종(당현종)보다는 덜 파렴치할지라도 충분히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동이었다. 당시 민간에서 영조와 문숙의를 두고 흉흉한 말들이 오고간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당시 궁궐 밖에서는 "문숙의의 어머니는 비구니였다"느니 "문숙의는 밖에서라도 씨를 받아 왕자를 낳은 것처럼 조작할 것"이라니 하는 등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영조와 문숙의의 사랑이 아름답지 못한 사랑으로 인식되었기에, 이처럼 흉흉한 소문이 나돈 측면이 있다. 궁궐 사람들이 이들의 관계를 안 좋게 전달했기에, 궁 밖 사람들도 그런 말들을 한 것이다.
'윤리적 이유'로 비·존속 궁녀와는 사귈 수 없어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문숙의를 죽인 것은, 문숙의가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한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숙의가 처음부터 할아버지의 첩으로 부적합했다는 인식도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조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원수들에게도 함부로 원한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뻘인 문숙의만큼은, 즉위하자마자 거리낌 없이 죽여 버렸다. 할아버지와 문숙의의 결합이 처음부터 천박한 것이었다는 인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정조가 문숙의를 문녀(文女)라고 부르며 천시한 이유 중 하나도 거기에 있다.
영조가 문숙의를 건드린 때는 1751년이고 사도세자가 빙애를 건드린 때는 1757년이었으니, 자신이 6년 전에 벌인 일을 잊어 버리고 아들을 나무란 영조의 처사가 궁궐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궁궐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십보 백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영조에게는 그 50보의 차이가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아랫사람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보다는 윗사람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한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영조 집안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왕이나 세자라고 해서 아무 궁녀나 마음대로 사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존속의 궁녀는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 비속의 궁녀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사법부가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윤리관을 위배한 왕이나 세자는 도덕적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야 했다.
이런 점을 보면, 궁녀 소이와 단둘이서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있는 드라마 속의 세종이 좀 대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시녀를 자기 방안에 들이는 것은, 에로스 상황을 연출하든 안 하든 간에,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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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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