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리영희 선생이 입원해 있던 병실을 찾은 박기서씨
김용삼
제가 알고 있는 그의 감옥시절 일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박 선생이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어느 날 박 선생 앞으로 엽서가 한 통 배달됐습니다. 발신자는 '리영희'. 그런데 그때 박 선생은 리영희가 누군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같은 감방에 있던 한총련 출신 청년에게 리영희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알려 주더라는 겁니다. 그 엽서에서 리영희 선생은 박 선생을 '의기 남아(義氣男兒)'라고 칭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박 선생은 출감 후 연희동으로 리 선생을 찾아뵈었고, 지난해 말 리 선생 빈소에 조문을 오기도 했습니다.
- 감옥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생활하면서 피해를 본 적은 없습니까?"있습니다. 우선 취직이 잘 안 됐습니다. 15년 전 거사 당시 부천에서 버스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출감 후 복직은 바로 됐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거길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후로 취직이 안되더라구요. 이유는 제가 '살인'을 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로 가서 한동안 버스 운전을 하다가 개인택시 자격을 따서 지금의 택시를 하고 있습니다."안두희 처단자는 160cm의 단신... "배운 사람이 잘못해서"어떤 이는 박 선생이 안두희를 처단했다고 하니 덩치도 크고 힘깨나 쓰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160cm의 크지 않은 키에 몸집도 왜소한 편입니다. 또 60대 초반의 육체노동자치고는 얼굴도 맑으며 곱상한 편입니다. 게다가 그는 무슨 '학습' 같은 걸 통해 이념이나 주의주장에 매몰된 사람도 아닙니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도 초등학교밖에 다니질 못 했다고 합니다. 대체 그런 그가 어떻게 범인(凡人)이 하기 쉽지 않은 일을 하게 됐을까요?
- 성장기와 집안사정이 궁금합니다."전북 정읍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했습니다. 스물한 살 때 서울로 올라 왔는데, 셋째 형이 먼저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배웠습니다. 부족한 공부를 보강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이런저런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느낀 생각 중 하나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 학식에 걸맞은 바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하나 들자면요?"안두희가 썼다는 <시역(弑逆)의 고민>이라는 책의 복사본을 우연히 하나 구해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을 시해할 당시 안두희는 장교였으니 엘리트라면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 자가 돈과 권력에 취해 이승만의 하수인을 자처하며 주구 노릇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근대 이후 우리 역사를 보면 저 같이 못 배운 사람들보다는 배운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생각됩니다."그의 입에서 돌연 '이승만' 석 자가 튀어 나오길래 최근 이승만을 둘러싼 몇몇 논란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KBS의 '이승만 특집방송'과 자유총연맹에서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운 일 등 말입니다.
- 최근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네, KBS가 '이승만 특집방송'을 한다고 할 때 다른 동지들과 함께 KBS 앞에서 열린 농성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4·19혁명으로 이미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물에 대해 공영방송에서 미화작업을 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뉴라이트 진영의 역사교과서 왜곡 작업도 알고 있습니까?"언론보도를 통해 들어서 조금은 압니다. 차마 입에 담기도 뭣한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주장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국선열들의 항일투쟁사를 조금이라도 배운 자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선엽-이승만에 이어 머잖아 박정희 미화 작업이 뒤따를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는 보수세력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음모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