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한 센터장치료 센터 옆에 있는 안성 내혜홀광장 공원 벤치에서 김용한 센터장이 활짝 웃고 있다. 강인할 것 같은 그에게 의외로 웃음이 많았다. 그는 이 인터뷰가 끝나자 광주 인화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송상호
그렇게 운명은 시작되었다. 천막을 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평택경찰서의 무수한 압박과 평택시청의 회유는 그와 '공대위'를 무력화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견뎠다.
계란으로 끝끝내 바위를 뚫은 드라마를 열다
집념 하나로 버티기엔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에바다 농아원의 비리는 생각보다 두터운 철옹성이었다. 평택시와 끈끈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싸움은 2003년 5월에 가서야 비로소 '공대위'의 법적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에 2003년 5월, 정식으로 한씨는 에바다 농아원장으로 임명받아 농아원으로 들어갔다. '비리 당사자인 C이사가 문제였지, 힘없는 직원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리와 상처로 얼룩진 에바다 농아원을 정상화하고자 함이었다.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7년 동안 적이 아닌 적으로 맞대응하던 농아원 직원들의 눈에 김원장이 곱게 보이질 않았다. 그것보다 그를 더 아프게 한 것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김용한이 원장 되려고 그랬나'라고 보는 시각이었다고.
그렇게 직원들과 함께 비리를 척결하고, 상처를 치유해나갔다. 기존 직원들을 한 명도 해고하지 않은 채로 3개월간 치유작업이 이뤄졌다. 그 후 공채를 통해 후임 원장이 임명되고, 그는 자리를 물러났다. 그가 그만두고 나올 때, 직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한 것은 그에게 두고두고 보람이었다.
하지만, 그 싸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평택경찰서는 '에바다 농아원'에 침입했던 그를 '주거침입'죄를 적용해 구속했다. 2007년도에 집행유예 2년에 징역 8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새로운 도전, 안성시장애아재활치료교육센터안성시장애인부모회(cafe.daum.net/asjangein)에서 강력하게 추진한 '센터건립'이 2009년도에 열매를 맺었다. 안성시립 장애아재활치료교육센터가 생겼다. 사회복지법인 에바다 복지회는 이 센터에 적임자로 김용한 센터장을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장애인 복지 전공자도 아닌 그지만, '투명 경영'에 소신이 있는 그는 또 한 번 도전을 했다. 적어도 '장애인'을 밑천 삼아 배불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평소 신념의 발로였다. 그는 센터장이지만, 이른바 '비상근'직에 월급 한 푼 없는 자리를 맡았다. 평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센터의 밑거름이 되고자 함이었다.
2009년 개원 시 30여 명이었던 치료대상자가 지금은 70~80명 정도로 늘어났다. 정규직사원 2명과 치료사 9명이 열심히 함께 뛰고 있다. 언어치료, 미술치료, 놀이치료 인지치료, 감각통합치료 등을 유아 장애아부터 고교장애아까지 실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