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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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벌써 10여 년 전이다. 중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 때문에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민수는 악착같이 벌어 또래 친구들이 대학에 다닐 무렵 이미 아파트 장만은 물론 고급차를 끌고 다녔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이미 기반을 잡았으니 이제 여자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결혼 후 아내의 눈치를 받고 살아가는 친구들과 달리 아직 싱글인 그는 지출 부문에서 통제받을 일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항상 친구들 사이에선 '물주'로 통했다. 나이 서른을 넘어선 특수차 운전직이었지만 그래도 어엿한 대기업의 협력회사 직원이었다. 결혼만 하면 모든 게 만사 오케이였지만 늘 여자가 문제였다.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이상형. 165cm 이상의 무조건 날씬하고 예쁜 여성, 이른바 '묻지 마, 뷰티걸'이었다.
이 이상형의 기준에는 일말의 타협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들을 몇 번 소개로 만나보긴 했다. 하지만 얼굴이 뛰어나게 예쁘지 않으면 절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결국 월급은 유흥비로 탕진하기 일쑤였고 사귀는 여성은 주로 정체불명의 직업여성들이었다. 그나마 또 여자가 생겼다 싶으면 6개월도 가지 못했다.
보다 못한 나는 아내에게 부탁했다. 아내는 민수가 원하는 스타일을 놓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10여 년간 연락이 끊겼다가 최근 고향집으로 돌아와 얼마 전 우연히 마주친 그녀(?)가 떠올랐던 것이다. 아내가 고심 끝에 내놓은 비장의 카드, 민수의 이상형 '그녀'는 바로 영희(가명)였다.
몸매는 물론 미모에 언변까지 갖춘 그녀, 영희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역시 아내의 말대로 내가 봐도 그녀는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예쁜 여자에게 한 번 꽂히면 헤어나지 못하는 민수, 결국 영희와의 첫 만남에 그만 홀려 버리고 말았다.
미모 밝히는 민수 vs. 돈 밝히는 영희민수가 유독 미모만 밝혔다면, 영희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돈을 밝혔다. 영희가 미모에 언변까지 겸비했다면, 민수는 은근히 경제력을 과시했다. 영희도 민수와의 첫 만남에서 바로 꽂히는 듯했다. 하지만 영희의 눈에 들어온 건 민수의 외모나 마음이 아닌 바로 만고불변의 관심 대상인 경제력이었으니…. 이유야 어찌됐든 두 사람이 서로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까지는 딱 맞아 떨어졌다.
만난 지 하루 만에 우리 부부와 과감히 연락을 끊은 그들은 그야말로 깨가 쏟아지는 나날을 보내는 듯했다. 무엇 하나 걸림돌이 될 것도 없었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데이트를 즐겼다. 아무리 분위기를 잡아도 영희씨가 스킨십(?)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뷰티걸'이라는 위로감 하나만으로도 민수는 그저 좋았다.
이윽고 한 달 후 우리 부부를 찾아 온 민수와 영희는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 겨우 만난 지 한 달되었는데, 벌써 결혼을 준비하고 있단다. '너무 빠른 것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어 민수를 따로 불러 물었다.
"만난 지 이제 한 달 되었는데….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거냐? 벌써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거면 좀 빠른 것 같은데? 그리고, 너 저번에 전화했을 때 영희씨가 유난히 스킨십을 거부한다고 고민하던데, 진도는 좀 나간거야? 뽀뽀나 해봤냐?""흐흐흐, 진도는 무슨…. 아직 손도 못 잡았어. 하지만, 너무 걱정 마. 결혼하면 해결될 거야….""야, 이 바보야! 결혼한다면서 손도 못 잡았다면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이면 너무 짧은데…. 신중히 생각해, 최소한의 신뢰는 있어야 하니 집안과 성품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고 결정해라. 그리고 영희씨가 이렇게 빨리 결혼을 허락한다면 그 이유도 잘 생각해봐.""야, 신부가 예쁘니까 배 아프냐? 친구가 잘 되가는데 제발 초치지 마라!"내가 무슨 말을 하던 민수는 들은 체 만 체, '소귀에 경 읽기'였다. 예쁜 여자면 사족을 못 쓰는 민수, 어찌나 즐거운지 이미 입이 귀에 걸려 웃고 있었다.
한 달 만에 결혼선언... 아파트에 혼수까지 일사천리로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민수는 마치 마법에 홀린 듯 서둘러 상견례를 마치고 영어 이름으로 된 최고급 아파트 전세계약까지 마쳤다. 그것도 부족해 신부 측 몫이라는 가전제품과 혼수까지 신용카드로 마구 지르기 시작했다. 조금 무리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렇게 결혼식 날짜까지 잡히며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결혼식을 1주일을 앞두고 한밤 중에 갑자기 민수가 찾아왔다. 영희가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야, 영희가 연락이 안 돼. 이거 어쩌면 좋냐? 며칠 전부터 묻는 말에 잘 대답도 안하고 이상한 조짐을 보이더니 그저께 밤부터는 휴대폰도 안 되고…. 집에도 안 들어왔다고 그러는데…. 아, 미쳐버리겠다!""너, 혹시 싸웠냐?" "아니, 그것도 아니야. 싸울 일이 뭐가 있겠어. 그저께 아침까지만 해도 한참 통화했는데…. 의견 차이나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어. 혹시나 해서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는데 영희씨 집에서 조금 더 기다려보래." 민수는 일 주일 동안 회사에도 나가지 않고 쓰디 쓴 소주병을 들이키며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흑흑, 영희씨를 찾아내란 말야!"하며 영희씨 집 안방에서 죽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울부짖어도 결국 결혼식 날짜는 그렇게 지나가 버렸고, 순진한 민수는 일생 일대 치욕적인 파혼의 경험을 겪고 말았다. 아…, 불쌍한 민수는 구슬피도 울어댔다.
"한 달 동안 영희씨 손이라도 한 번 잡아봤다면 또 억울하지도 않겠다. 예쁜 여자 타령만 하다 말 한마디 못하고 파혼당한 나 같이 멍청하고 불쌍한 놈도 없을 거야." "결혼식 준비도 다 끝난 상태에서 이렇게 돼 더 안타깝구나. 하지만, 내가 볼 땐 지금 시점에서 파혼한 게 너한테 더 잘 된 일일지도 몰라." 나의 어줍잖은 위로도 민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일은 그 다음에 터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아,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결혼 1주일 앞두고 행방불명된 신부, 어찌하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