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유성호
상황과 해석
곽 교육감은 얼마 전 다시 한 번 '3무 원칙'을 강조했다. "사퇴 대가를 지시한 바 없고 보고받은 바 없고 추인한 바 없다." 객관적 상황은 어떤가? 먼저 두 캠프의 관계자들 사이에 후보사퇴의 대가로 선거비를 보전해주기로 한 구두약속이 존재했다. 그 약속을 믿고 박 교수는 단일화협상결렬 이틀 만에 사퇴했고, 곽 후보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곽 교수 측은 그 약속을 술자리 만담으로 치부하나, 적어도 박 교수는 ("권리모드"를 취할 정도로) 그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곽 교육감은 그것을 "동서지간의 독단적인 충정에 입각한 해프닝"이라 부르나, 그가 "지시한 바 없고 보고 받은 바 없고 추인한 바도 없다"는 그 약속은 실제로 후보사퇴가 이루어지고 그 후에 권리요구가 따를 만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곽 교육감이 이를 당시에 인지했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다. 따라서 곽 교육감의 해명을 믿는다면, 결국 곽 교육감 캠프의 한 관계자가 결과적으로 후보사퇴를 유도하기 위해 곽 교육감의 이름을 팔아 박 교수를 기만한 셈이 된다.
차용증은 어떤가? 그에 대해서도 곽 교육감은 역시 그것의 작성을 "지시한 바 없고 보고 받은 바 없고 추인한 바도 없다"고 할 것이다. '최후진술문'을 보면 곽 교육감이 당시의 상황을 권리모드에서 구제모드로 전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결국 강 교수가 곽 교육감에게 상황에 대해 거짓말을 한 셈이다. 다시 말해 강 교수가 곽 교육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차용증을 주고받음으로써 사실상 후보단일화에 관련한 거래를 성립시켜 버린 것이다.
곽 교육감이 모르는 사이에 캠프의 관계자에 의해 후보사퇴를 대가로 한 금전 제공의 약속이 이루어졌고, 곽 교육감이 모르는 사이에 그 대가의 지불이 실행되었다. 이것이 존재하는 객관적 상황이고, 남은 것은 이에 대한 곽 교육감의 '주관적 해석'뿐이다. "지시한 바 없고 보고받은 바 없고 추인한 바 없다." 곽 교육감의 선의를 믿는다면, 이제 곽 캠프와 측근의 행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들은 왜 남의 돈을 자기가 약속하고, 왜 남의 돈을 자기가 꿔주었을까?
박탈당한 유권자의 권리
선거비 보전의 구두약속이 있었고, 단일화를 위한 후보사퇴가 있었고, 차용증과 더불어 2억의 돈이 전달됐다. 이로써 거래는 사실상 이루어진 것이다(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돈을 절대로 줘서는 안 되는 이유다). 다만 정직하지 못한 측근들을 둔 탓에 곽 교육감은 이 중요한 사실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 일을 저지른 것은 그의 캠프에 속한 사람이며, 그가 직접 일을 위탁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가 이 모든 사태에 아무런 도의적 책임도 없다고 해야 할까?
박 교수의 사퇴는 곽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선거비를 보전해주기로 약속이 없었다면, 박명기 교수는 사퇴를 하지 않았을 테고, 선거의 결과 역시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은 그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 느낄 게다. 하지만 보수성향이나 중도성향의 유권자들도 그럴까? 그들은 자신들이 귀한 시간을 쪼개서 참여한 투표의 결과가 부당하게 왜곡됐다고 느낄 게다. 한마디로 그들은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곽 교육감이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 그 일은 유권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는 심각한 반칙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곽 교육감의 옹호자들은 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예 없어 보인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나는 몰랐기에 결백하다. 따라서 내가 저야 할 도의적 책임이라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설사 자신은 몰랐다 하더라도, 자기 캠프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당선됐다면, 당연히 당선을 반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긴급부조'에 대하여
곽 교육감에게 선택의 기회는 있었다. 가령 작년 10월 말 선거비 보전의 약속이 있었음을 인지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정직하게 밝혀야 했다. '나 모르게 단일화 과정에서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약속은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박 교수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캠프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회피할 의사는 없다. 다만 유권자들의 판단을 바라며, 그에 따라 사퇴 여부도 결정하겠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밝혔다면, 그는 외려 여론의 지지를 받았을 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박교수에게 몰래 2억의 돈을 건네는 방법을 택했다. 곽 교육감의 옹호자들은 그게 무슨 숭고한 휴머니즘의 발로나 되는 것처럼 얘기한다. 가령 한상희 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공직자로서 동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한 온정주의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냉혈한이 아니어서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곽 교육감이 박 교수를 냉대함으로써 박 교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그는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진보가 공사 구별했다가는 졸지에 '냉혈한'으로 몰릴 판이다. 과연 그럴까? 곽 교육감이 정말로 친구를 돕고 싶었다면 선관위에 문의하여 합법적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돕는 데에 도덕적으로 지극히 의심스러운 방법을 택했고, 위탁을 받은 강경선 교수는 돈을 건네며 이중차용증까지 주고받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는 뇌물사범들의 전형적 수법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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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사회적 비용을 초래했다 한들 나는 감히 그를 비난하지 못하겠다. 박명기 교수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싶어 했을 그의 배려심, 금품 모금이 엄격하게 제한된 우리의 제도를 고려하면 더 좋은 방법이 나오기 어려웠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돈을 몰래 건넨 것은 친구의 곤궁을 밖으로 알리지 않기 위한 섬세한 배려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논리는 곽 교육감 자신이 반박한다. '최후진술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오해할 만한 해프닝이 없었더라면, 즉, 정말로 조건 없는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 (줄임) 보다 일찍 공개적인 방식으로 박 교수에게 긴급부조를 행해서 급한 불을 꺼줬을 겁니다.
친구를 도울 "공개적인 방식"이 존재함은 곽 교육감도 인정한다. 그 역시 특정한 조건("정말로 조건 없는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에서라면 "공개적인 방식으로 박 교수에게 긴급부조"를 행했을 것이라 말한다. 한마디로 그가 비밀리에 돈을 건넨 것은, 단일화에 "조건"이 달렸기 때문이다. 이 경우 '주관적으로' 선의를 주장하더라도 '객관적으로는' 단일화를 위한 거래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친구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세간을 의식해서 비밀리에 돈을 건넸다. 잘한 선택일까?
'무죄추정의 원칙'
최대한 호의적 해석을 통해 곽 교육감의 '선의'를 그대로 믿어주자. 그때조차도 그의 캠프와 그의 측근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점,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유권자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점, 이른바 '긴급구제'에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곽 교육감은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곽 교육감 측은 사안을 정치 문제화하는 가운데 도의적 책임의 문제를 법률적 유무죄로 환원시켜 버렸다. 이 환원을 통해 사라진 것은 윤리적 책임의 영역이다.
앞에서 한상희 교수는 나의 주장을 "'법률에 위반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로 압축"했다. 물론 이는 내 주장의 왜곡이다. 하지만 그 왜곡의 바탕에는 곽 교육감 옹호론자들의 뒤틀린 논리가 그대로 깔려 있다. 가령 한상희 교수의 말을 뒤집어 보자. 그럼 '법률에 위반되지 않는 한 도덕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다'는 명제가 얻어진다. 그것이 바로 곽 교육감을 옹호하는 측의 논리다. 그들이 '유죄판결 전까지 절대로 사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판결 이전에 윤리적 문제제기를 틀어막는 데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 것이 이른바 '무죄추정의 원칙'. 원래 이 원칙은 '기소 전까지 곽 교육감의 피의사실을 흘리지 않는 것'이나, '곽 교육감의 보석이 허용될 경우 당연히 그가 직무에 복귀하도록 보장하는 것' 따위를 의미한다. 하지만 곽 교육감의 옹호자들은 이를 '판결 전까지는 어떤 도덕적 비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왜곡했다. 판사만이 사회적 사건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이 역시 도덕을 법으로 환원시킨 데서 비롯된 궤변이다.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궤변이 있다. '사퇴는 판결이 내려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이 역시 문법적 오류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사퇴'다. 유죄판결이 내려지면, 곽 교육감은 자동적으로 면직되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을 받고 나서야 '아, 이제 사퇴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법은 도덕의 극단적 경우만을 규제한다. 법이 규제하는 그 좁은 영역 밖으로 넓디넓은 윤리의 영역이 존재한다. 자칭 '진보'라는 이들이 내다버린 것은 그 넓은 영역에서 책임의 윤리적 주체가 되려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