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트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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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트랍의 본명은 게오르크 루드비히 리터 폰 트랍(1880~1947)이다. 그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줄여서 트랍 남작이라 부른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해군 대령으로 제대했고,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폰 트랍이 일곱 아이의 가정교사로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에서 폰 트랍은 우여곡절 끝에 가정교사인 마리아와 결혼한다.
그런데 이들 가정에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폰 트랍은 독일 해군에 의해 징집된다.
그러나 나치정권을 싫어했고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흡수 통합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노래경연대회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는 심사결과가 발표되는 틈을 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폰 트랍 일가는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망명한다.
여기까지 얘기가 얼마나 사실일까? 상당 부분이 허구다. 폰 트랍은 188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땅이던 지금의 크로아티아 자라(Zara)에서 태어났다. 1894년 해군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리이카에 있는 해군학교에 들어가 4년 후 졸업했다. 그리고 2년 과정의 항해실습을 마치고 1900년 마리아 테레지아 함대에 배속되었다. 1902년에는 장교시험에 합격했고, 잠수함에 매료되어 1908년 새로 만들어진 잠수함 전단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1915년 4월부터 U-5의 함장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지면서 모든 해안선을 잃게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해군이 필요 없게 되었다. 폰 트랍은 1911년 리이카에서 어뢰회사를 운영하던 영국인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손녀인 애거시 화이드헤드와 결혼했다. 그들은 리이카에서 멀지 않은 폴라(Pola)에 살림을 차렸다. 그들은 1914년 잘츠부르크 근교의 첼 암 제(Zell am See)로 이사했으며, 모두 7명의 자식을 낳았다. 1918년 제대와 함께 폰 트랍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아내가 물려받은 재산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