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17일 오후 보수단체인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회원들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북좌경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 검정 취소'를 촉구하며, 금성교과서를 채택한 학교 명단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권우성
학생의 말을 들어보니 수업시간에 열심히 가르쳤던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 나오는 타율성론은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론이다. 우리의 역사는 대륙의 힘이 강할 때는 대륙의 침략과 영향을 받고, 해상 세력의 힘이 강할 때는 해상의 침략과 영향을 받은 역사로만 점철되어 있다. 또 항상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가 진행되어 갔을 뿐 우리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타율성론의 핵심이다.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며 비판하던 이들은 교과서가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든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한국현대사학회'가 교육과정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내용들은, 우리나라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공업화나 정부수립 같은 중요한 일을 전혀 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교과서로 근현대사를 배우면 우리 학생들은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까?
임시정부 부정은 "친북 이적 행위"최근 3주 동안 토요일마다 백범기념관에서 하는 교사 연수를 들었다. 연수 제목은 <한국 근현대사와 백범 김구 선생>이다. 백범기념관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교사 연수라고 한다. 극우에 가깝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는 김구 선생이고, 그 김구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관에서 역사 교사를 대상으로 연수까지 하는 걸 보면, 작금의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보수 일각에서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우고, 김구는 테러리스트라고 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건국절이라는 명칭을 쓰자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그 연수를 듣고,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유엔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들어가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과서 포럼이나 한국현대사학회가 그토록 적대시하고 있는 북한을 이롭게 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유는 이렇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했지만,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는 독립선언을 하고,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다.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인데, 영토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국외에 임시정부를 세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한 것이었다.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을 재건한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공식 입장이다.
이 사실은 최초의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을 재건한다'고 쓴 문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1948년 9월에 발행된 관보에 연도를 대한민국 30년(1919년 임시정부를 수립한 해에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1948년은 그 연호 계산법에 의해 대한민국 30년이 된다)이라고 표기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1919년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족사의 정통 국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은 유엔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고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1948년 9월 9일에 건국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이므로 정통성 경쟁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즉,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후, 1919년의 전 국민적 독립선언과 함께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이 재건된 것이라면, 남한이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가 된다. 그러나 1948년에 처음 건국한 국가라면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북한에도 정통성 경쟁에 있어 동일한 기회를 주게 되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발언을 하면 친북, 종북이라는 말을 쓰는 쪽에서 이토록 북한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준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
가장 어리석은 역사 왜곡오래 전 <라이어>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기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남자는 두 명의 여자와 중혼을 한 상태인데, 어느 날 사고가 나서 중혼을 들킬 위기에 처하자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한다. 그런데 그 거짓말은 계속 다른 소동을 일으키고, 주인공은 계속 거짓말을 한다. 결국 주인공의 거짓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요즘의 역사 논란을 보며 이 연극이 떠올랐다. 친일파를 두둔하려고 하다 보니, 친일파 청산을 방해한 이승만 대통령을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로 포장해야 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지워야 했고, 김구는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여야 했다.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려 하다 보니, 일제 강점기는 긍정적인 시대가 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식민지 공업화론을 내세워 일제 강점기를 근대화를 이뤄낸 긍정적인 시대로 포장했다.
일제 강점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공업발전을 이루지 못한 채 지금도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제시대는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런 것이야말로 역사 왜곡이다. 그것도 가장 어리석은 형태의 왜곡이다. 우리나라가 잘났다고 왜곡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가 어리석고 못났다고 왜곡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토록 어이없는 왜곡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역사 왜곡과 왜곡된 시각으로 집필될 교과서를 그냥 받아들여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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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이롭게 하다니...대단한 '보수'나셨다,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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