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임금의 모습.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사계절
한때 평양성과 중국 본토(요서 지방)까지 점령했던 백제. 이런 백제의 영광을 일거에 무너뜨린 장본인은 토목사업에 미쳐버린 개로왕(재위 455~475년)이었다. 그는 고구려 스파이의 부추김에 넘어가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이다가 민심도 잃고 국고도 탕진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기록이다.
"나라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宮室)·누각·정자를 마련했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제방을 쌓으니, 사성(한강변의 풍납토성) 동쪽에서 숭산(한강변의 검단산) 북쪽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기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했다."
알 위에 알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험한 상태 즉 누란지위(累卵之危)를 자초할 정도로 토목사업에 심취한 개로왕. 그는 결국 고구려 장수태왕에게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백제 출신 고구려 군인들에 의해 치욕적인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충남 공주)으로 천도한 백제는 사상 최악의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삽질로 쇠락한 백제, 웅진(충남 공주)에서 다시 부흥이런 분위기 속에서 웅진시대의 백제왕들은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개로왕을 뒤이은 문주왕은 즉위 2년 만에 쿠데타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 뒤를 이은 삼근왕도 허수아비 임금으로 살다가 즉위 2년 만에 15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뒤이어 즉위한 동성왕 역시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개로왕에 뒤이은 문주왕·삼근왕·동성왕의 운명에서 드러나듯이, 웅진 천도 이후의 백제 왕실은 우울함 그 자체였다. 한성을 잃은 백제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태로 백제가 망했다면, 웅진은 불운의 도시로 기억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제의 운명은 웅진에서 끝나지 않았다. 웅진시대 후반에 백제가 기적처럼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한성을 잃은 지 사반세기 만에 웅진은 무령왕(재위 501~523 혹은 502~523)이라는 영웅을 배출했고, 그는 다 죽어가던 백제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참고로, 대부분의 서적에서 무령왕이 501년에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무령왕이 즉위한 정확한 시점은 동성왕 23년 12월로서 양력으로 치면 501년 12월 26일부터 502년 1월 23일 사이다. 501년보다는 502년에 즉위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무령왕 시대에 안정을 되찾은 백제는 국방을 강화하고 고토를 수복하면서 중국과의 문명 교류에 박차를 가했다. 최전성기인 한성시대의 영광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웅진시대 나름의 영광을 구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령왕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만성적인 압박을 저지하고 나아가 도리어 고구려를 압박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