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 공사관 직원 일행들.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주미 공사), 이하영, 이재연이며, 뒷줄은 수행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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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종은 친일 성향의 김홍집 내각을 해체하고 초대 주미 전권공사를 지낸 친미파 박정양(朴定陽, 1841~1904)을 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1896년)했습니다. 박정양이 부상하면서 그와 미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완용, 이채연 등도 중용됐는데, 이완용은 38세의 나이로 학부대신(현 교육부장관)이 되었습니다. 이 내각에서 주목을 끈 사람은 단연 이완용이었습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2년 가량 주미공사관에 근무한 적이 있어 당시로선 드문 '미국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시절, 이완용은 독립문 건립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바 있습니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란다."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무리하게 내정개혁(소위 '갑오개혁')을 강요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조선정부는 1895년 9월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손잡고 친일세력 제거 차원에서 친일파의 거두 박영효를 축출했습니다. 그에 앞서 8월에는 민영환을 주미 전권공사로 등용하는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를 기용하였습니다. 이로써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됐는데 조정은 친미·친러파가 주축이 되었고 이들은 명성황후 민씨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이로써 조정에서 친일파들이 몰락하자 위협을 느낀 일본은 급기야 그해 10월 8일 명성황후 살해사건, 즉 '을미사변'을 강행했고 이를 계기로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림들이 주축이 돼 전국에서 의병('을미의병')들이 궐기하면서 전국은 다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중앙군을 내려 보내 의병 진압에 나섰는데 왕실 친위대도 이에 가담했습니다. 친위대가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타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들은 세력 만회는 물론 당시 일본세력에 신변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위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해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관으로 고종의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인데, 이를 계기로 다시 친러내각이 출범했습니다. 아관파천을 주도하면서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변신한 이완용은 이후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 요직을 맡으면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일제와 친일세력들에게 맞서 반일노선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는 고종과 친러파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는 친러파들에게 부담스런 존재로 변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의 대가로 함경도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 등의 이권을 요구하였으며, 또 러시아 군사교관을 보내 영향력 확대를 꾀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독립협회와 함께 당시 외부대신으로 있던 이완용은 러시아측의 그같은 요구를 반대 혹은 묵살했고, 이 일로 이완용은 러시아를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완용이 호의를 보인 세력은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당시 주미공사 알렌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미국에 대해서는 많은 이권을 챙겨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