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움
그의 치악산 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바람처럼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여행자처럼 그 집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아홉 해가 훌쩍 지났단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는 바람처럼 정말이지 빠르게 흐른다.
그 사이에 시인은 여행자가 아니라 숲의 생활자로 변신했고, 그와 함께 사는 가족(?)은 늘었다가 줄었다. 그가 함께 사는 가족은 개 두 마리와 닭 두 마리, 그리고 벌들이었다. 처음에는 한 통으로 시작된 양봉은 점점 벌통 숫자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올해 엄청나게 쏟아진 비 때문에 벌들이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났단다. 하긴 가족도 늘 곁에 있는 건 아니다.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니.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는 이렇게 치악산 자락을 찾아들어가 살게 된 시인 정용주가 '치악산 살이'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정감 있게 풀어낸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이어지면서 도시에서 삭막하게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내 마음을 울리다 못해 부럽게 만들었다.
에세이가 아닌 산문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마저 자아내게 하는 시인의 글은 시인이 사는 산골 마을의 풍경을 눈앞으로 고스란히 옮겨 놓아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끼게 했던 것이다.
물론 사내 혼자 사는 산골 삶이 숲속에 피어난 야생화들처럼 그윽한 향기만을 간직할 수야 없다. 남루한 삶은 도시를 떠나 산골로 간다고 해도 이어지는 게 이치이므로.
처음에는 시인도 울타리를 치면서 홀로 사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노력했던 중년 남자처럼 무서움을 타기도 했더란다. 하지만 시인은 살면서 깨닫는다. 실상 무서움이란 실제로 있거나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상상의 두려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물론 깨닫는다고 두려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주는 건 아닐 것이다. 대신 두려움이 사라지게 자신을 설득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을 것, 이라고 짐작한다.
산골에서 살고 싶은 도시인들은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건 산골에 살기 시작한 시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 앞에 텃밭을 가꾸던 시인은 어느 날 부터인가 텃밭에서 손을 뗐다. 혼자 살면서 먹을 수 있는 푸성귀의 양이 얼마나 되겠나. 시인이 먹어치우는 속도보다 푸성귀가 자라는 속도가 더 빨랐던 것. 결국 시인은 텃밭을 내버려두었고, 텃밭은 푸성귀들이 웃자라다 못해 꽃을 피우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결국 시인은 텃밭의 푸성귀들에게 자신이 편한 대로 살고자 치악산 산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마음껏 자랄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