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살기로 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인권위 공무원의 '정직한' 일기 ⑥] 도법스님이 전해준 화두

등록 2011.09.20 11:33수정 2011.09.2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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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최고 조사관으로 손꼽히던 강모 직원의 '계약해지'에 항의해, 인권위 직원 80여 명이 1인 시위, 언론 기고, 자유게시판 게시, 탄원서 제출 등을 진행했다. 인권위는 이 중 11명에 대해 9월 2일 자로 정직 및 감봉 1~3개월 등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앞장서 보호해야 할 인권위에서 발생한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징계자들은 공무원의 정당한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정직' 처분을 받은 직원의 '정직한 일기'를 싣는다. [편집자말]

극락전 요사채 ⓒ 육성철


지리산 실상사의 새벽은 고요했다. 네 명의 중징계 정직자와 한 명의 '사실상' 해고자, 그리고 서울과 광주에서 합류한 세 명의 징계자를 더해 모두 여덟 명이 수행자 선방에 묵었다. 팔월 열여드레 하현달은 고찰의 중심 법당인 보광전 팔짝 지붕을 넘은 지 오래, 잘 익은 단감이 찬 이슬을 맞아 우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속이 드러난 단감을 약수에 씻어 껍질째 베어 물었다. 단맛이 혀를 감싸는가 싶더니 곧바로 떫은 기운이 입 속에 퍼졌다. 한 입으로 두 맛을 즐기며 달빛에 잠든 국보 제10호 삼층석탑을 바라보았다. 옛 사람들은 자연의 경계를 허물지 않는 가람 배치의 멋을 알았다. 실상사는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은근함을 간직하고 있다.

인시를 넘어 법고가 울렸다. 몸을 씻고 뒷간에 들어 속을 비웠다. 실상사 뒷간은 생태의 순환을 고스란히 수용한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물질을 한 톨도 내버리지 않고 사람에게 돌려보낸다. 소변은 따로 모아 정화하고 대변은 톱밥과 뒤섞어 거름으로 뿌린다. 뒷간에 쭈그린 채 문 앞에 새겨진 문구를 소리 내어 읽고 되새겼다.

'밥은 똥이 되고 똥은 밥이 된다. 비우고 또 비우니 큰 기쁨입니다.'

실상사의 새벽예불은 화엄경의 정행품을 낭송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목탁 소리의 운율을 느끼며 수행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발원했다. 비록 징계 중이나 여전히 공무원 신분인지라 특정한 대목에서 눈길이 확 쏠렸다.

"정치인과 공무원을 볼 때엔 반드시 지극한 마음으로 '중생들이 정의와 마음 굳게 지켜 항상 공평무사함 실천하여 지이다'하고 발원할지니라."


실상사 수행자 선방 ⓒ 육성철


아침공양을 마치고 경내를 산책하다 도법 스님의 부름을 받았다. 고작 하룻밤 선방에 묵은 이들에게 귀한 시간을 내준 스님의 배려에 감사하며 극락전 요사채에 들었다. 스님은 차를 달여 따라주며 실상사까지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속세에 묻어둔 구차한 사연을 접한 스님은 말없이 웃을 뿐 시원스런 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세상의 이치를 에둘러 짚어주며 평생 가슴에 새길 만한 화두를 차분히 담아주었다.

스님이 따라준 위산모차는 우려낼수록 쓴맛이 더했다. 스님은 이 세상이 차 맛과 비슷해서 단맛, 쓴맛, 매운맛, 떫은맛이 다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단맛만 보면서 살아가려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했다. 빙긋이 웃으며 "사람은 쓴맛을 보면서 커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교훈을 떠올렸다. 쓰고 떫던 위산모차도 찻잔이 차는 대로 계속 들이키자 어느 순간 달게 느껴졌다.


인드라망 무늬 ⓒ 육성철

도법 스님은 지리산 실상사를 근거로 인드라망(생명평화) 공동체를 일군 주역이다. 오늘날 전국적 명소로 자리 잡은 지리산 둘레길도 스님이 체감한 절박한 위기에서 시작됐다. 도시의 삶은 시시각각 숨통을 조이는 비극일 수밖에 없기에 서둘러 상생의 길을 찾자는 게 스님의 호소다. 스님이 생명평화의 깃발을 들고 전국을 도보로 순례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문명사적 대안은 자연과 인간의 동반자적 관계입니다. 민족사적 대안은 남과 북의 평화입니다. 한국사적 대안은 진보와 보수의 공존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회색분자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단색보다 회색을 조직화할 실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영의 논리를 벗어나 생명의 관점에서 운동을 한다면 이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도법 스님이 머무는 극락전 요사채엔 창이 두 개다. 스님의 자리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지리산 능선이 훤히 들어오고 그 사이에 인드라망을 상징하는 붉은 무늬가 있다. 도법 스님이 주창해온 생명철학을 홍익대 안상수 교수가 형상화한 그림이다.

도법 스님이 '21세기 위대한 탄생'이라 평한 문양에는 위로 해와 달, 식물, 아래로 사람, 왼쪽으로 새와 물고기, 오른쪽으로 네발 달린 짐승이 그려져 있다. 도법 스님은 "이 모든 것들과 더불어 '죽기 살기로' 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실상사 #도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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