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개(왼쪽, 윤다훈 분)와 초랭이(채희재 분).
MBC
내관(內官)이란 표현은 궁에서 일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고, 내시(內侍)란 표현은 고자가 아닌 일반 남자 시종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내관이나 내시란 용어를 중국의 환관(고자 출신 시종)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기로 하자.
초랭이는 남자가 아니라는 독개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사극 속의 시종들은 어느 시대건 간에 한결같이 고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에 비해 한국에서는 내시가 훨씬 늦게 출현했고, 거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어떤 헤어숍에는 '남성 커트 전문' 혹은 '남성 커트 얼마' 하는 식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남성 커트'는 '남성 헤어 커트'의 준말이다.
그런데 고대 중국에서는 무시무시한 의미의 '남성 커트'가 있었다. 고조선 시기의 중국에서는 '남성' 즉 남성성을 합법적으로 '커트'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궁형 즉 거세형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남성'을 거세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존재했기에 고자들이 '대량 생산'될 수 있었고, 그랬기에 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환관 조직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시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한국의 경우는 달랐다. 한국에서 '남성 커트'가 시작된 것은 몽골 간섭기(1270년 이후) 즉 고려 후기였다. 몽골제국(원나라) 황실에 바쳐진 고려인 고자들이 출세하는 모습을 보고서 고려 하층민 사이에서 자발적인 궁형이 유행한 것이다. <고려사> '환자 열전'에 당시의 풍경이 스케치되어 있다. 환자(宦者)란 환관·내시·내관과 같은 말이다.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이것(몽골에서 출세한 고자들)을 부러워하여, 아버지는 아들을 거세하고 형은 동생을 거세했다. 또 강포한 사람들은 좀 분한 일이 있으면 스스로 거세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거세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졌다."이 글은 고려 후기부터 고자들이 궁중 실세로 성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중 하나를 설명해준다. 중국에서처럼 공식적인 궁형 제도가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 후기에 자발적인 궁형이 유행한 탓에 고자들의 대량 공급과 조직화가 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그들이 고려 후기부터 궁중 실무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자발적 궁형이 유행하기 이전에 고려 왕궁에 있었던 내시들과 몽골제국에 바쳐진 고려 출신 내시들은 어떤 원인에 의해 '남성'을 잃었을까? <고려사> '환자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고려의 엄인(閹人, 환관)들은 본래 일반 서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한 노비들이었다. 고려에서는 부형(腐刑, 궁형·거세형)을 행하지 않았기에, 어렸을 때에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다."이에 따르면, 고려에는 본래 궁형이 없었기 때문에 비인위적 원인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들을 궁궐에서 채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고자가 된 대표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 외의 원인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몽골 간섭기 이전의 고려 사회에서는 '남성'을 인위적으로 거세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 이전만 해도, 궁에서 고자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또 전문적인 내시제도가 존재하기 힘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도 한국의 내시제도가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