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할 수 없는 사회, 아이들이 병든다

등록 2011.09.17 17:00수정 2011.09.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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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반장이 돼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관심을 받으며 칠판에다 떠든 아이 이름 적는 '재미'도 느껴보고,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한껏 즐기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머리가 굵어서인지 그땐 뽐내려는 치기어린 욕심보다 학급 내 불합리한 것들을 반장이 돼 앞장서서 바꿔보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12년 동안 단 한 번도 반장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도 어릴 적 깨나 공부도 했고, 운동도 곧잘 해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두루 인정을 받았으니 하자고만 했다면 그닥 어렵지 않게 당선됐을 것이다. 하지만 반장 선거에 나갈 수 없었다. 한사코 어머님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반장이 되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머님은 숱한 경험을 통해서 깨닫고 계셨다. 20~30년 전인 그때만 해도 반장은 운동장 모래 한 트럭분, 어린이 회장은 두 트럭분, 이렇게 구체적인 액수가 학교로부터 공공연하게 하달되는 시절이었다. 소풍 때 담임선생님 도시락 챙기는 건 물론, 심지어 학급임원 부모들을 조직해서 학교의 각종 금품 요구에 대표 자격으로 응해야만 했다.

자식 반장하겠다는 데 가로막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계를 홀로 꾸리셔야 했던 어머님은 학년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애초 꿈도 꾸지 말라'며 엄포를 놓으셨다. 어떻든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학급 친구들의 리더가 되어 그들과 함께 '학급 자치'의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은 꿈만은 버릴 수 없었다.

반장 한 번 못해 본 채 교사가 됐고, 지금은 먼발치에서 아이들의 반장 선거를 지켜보는 입장이 됐다. 요즘 아이들은 왜 반장이 되고 싶어 하는지, 공약은 무엇이고 어떤 친구들이 선거운동을 돕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하다. 과거의 내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고등학교의 경우, 선거전의 풍경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요즘 반장이라는 '직위'는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다. 반장이 된 아이나 그를 뽑아준 아이나 반장을 바라보는 인식이 그렇다는 거다. 어떻든 대학입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라는. 보충수업에 야간자율학습까지 의자에서 단 몇 분도 일어날 짬이 없는 현실에서 공약이란 어디까지나 선거용 미사여구일 수밖에 없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 공약을 실천하라고 다그치는 친구들이 거의 없는 이유다.

단지 반장이 됐다는 이유로 과거처럼 학교가 금품을 바라거나 소풍 때 담임선생님 도시락을 챙기라며 대놓고 요구하는 건 사라졌지만, '한 턱 내는' 관행만큼은 여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아이들은 반장이 된 친구를 축하하며 맨 먼저 건네는 말이 '반장됐으니 한 번 쏴라'다. 아이들조차도 기분 상의 문제라며 관대하게 바라보는 분위기다.


생활 속에서 관행은 법보다 힘이 세다. 반장이 된 아이의 부모는 어김없이 같은 반 친구들에게 피자를 돌리고, 교무실에 들러 선생님들에게 떡과 과일을 대접한다. 옆 반 반장 엄마가 하니 하지 않을 수 없어서고, 날짜가 겹치는 걸 막기 위해 순번을 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관행이란 게 대개 그러하듯, 고마움과 기분에서 나온 '선의'라고 해도 다음에 될 반장들에게 본의 아닌 폐를 끼치게 된다.

몇 해 전 담임을 맡은 학급에 반장을 해보고 싶다는 아이가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뽑아주는 것도 아닌데 왜 내게 부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완강하게 출마를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딱히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탐탁지 않게 여기고 계시다는 거다.


왜 반장이 되고 싶은지, 공약이 뭔지 따위는 애초 묻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라면 그러겠노라 답하고 돌려보냈다. 그 아이를 통해 20~30년 전의 내 모습이 자꾸만 겹쳤다. 과연 그의 부모는 '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예전의 학교가 아니라며 설득하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스승의 날 양말 한 켤레 챙겨 드리지 못하는 형편이라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아파트 관리실에 맡겨두고 간 학부모들의 명절 선물들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 밤중에 '택배 기사'가 되어야만 했던 이야기, 롤케잌 안에 끼워 넣은 상품권을 소액환으로 바꾸어 등기우편 보내려다 잠시 우체국 도로변에 세워둔 차가 견인된 사연 등을 들려주며 담임으로서 맹세코 그런 부담을 드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소용없었다.

아이는 짐짓 태연했지만 속상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담임과 상담할 때 '우리 집이 부자였으면 좋겠다'며 생뚱맞은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비록 공부를 썩 잘 하거나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자기 생각은 똑 부러지게 말하고 힘들어하는 친구를 나서서 도울 줄 아는 의협심을 지닌 멋진 친구였다. 담임으로서 내심 반장이 됐으면 싶었는데 끝내 좌절된 것이다.

한낱 반장이 되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다는 '세상 물정'은 세월이 흘러도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재작년엔가 초등학생 아들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장이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치킨과 콜라를 돌리지 않는다'며 푸념한 걸 듣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엄마, 아빠 돈 들 테니, 나 반장 안 할게'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올해 아들 녀석 반엔 반장이 넷이란다. 그조차도 '월(月) 반장'이라, 1년이면 학급 친구 모두가 한 번씩은 반장을 해보게 되는 셈이다. 기실 이는 초등학생 학부모의 치맛바람을 어떻든 막아보려는 고육지책이다. 철부지 초등학교 시절, 반장의 역할이랄 게 뭐 그리 중요하고 대단할까마는, 굳이 그럴 바에야 반장이라는 용어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정작 문제는 신념과 의지를 갖고 무언가 도전해보려고 해도 돈이 없으면 애초 꿈조차 꿀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구조와 관행에 있다.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사실을 몸으로 깨달아버린 아이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미래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고, 욕심을 시나브로 버리게 된다. 그들더러 왜 꿈이 없느냐고, 이상을 지니라고 다그치는 것은 시작부터 공정하지 않은 사회가 스스로의 치부를 감추려는 기만일 뿐이다.

돈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회일진대, 개혁의 주체도 돈 있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되어 나라를 바꾸려고 해도, 교육감이 되어 교육개혁을 꿈꾼다 해도 돈이 없으면 출마 자체가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어떤 이들에게 몇 억 정도야 그저 '껌값'일 뿐이겠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평생을 아껴 저축해도 모을까 말까하는 거액이니 '피선거권', '공무담임권' 등의 권리는 사회 교과서에서나 듣게 되는 남의 얘기일 수밖에 없다.

돈이라는 조건이라도 걸어놓지 않으면 '개나 소나' 선거판에 뛰어들어 엄청난 국가예산이 소요되고 혼탁하고 어수선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하지만 동의할 수 없다.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을 뽑는데 국가 예산을 쓰는 건 당연하지 않나. 출마자의 자질을 검증해 미리 걸러내겠다면 서명 등 돈이 아닌 다른 방식이 얼마든지 고민해 볼 수 있다. 선거에 보증금 마냥 미리 돈을 거는 방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번 곽노현 서울시교육감과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 간의 돈 거래 의혹도 따지고 보면 여기서 비롯됐다. 자신의 소신을 정책으로 만들어 실현시켜보겠다고 선거에 출마했다가 자칫 낙선하게 되면 평생 갚지 못할 빚더미에 나앉게 되는 현실에서 어느 누가 꿈을 가질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 선거판은 도박판과 비슷하다고. 결국엔 선거판에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한 돈 많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라는 거다. 돈이 고스란히 표로 돌아오는 현실을 갈아엎지 않는 한 이와 유사한 사례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지금 TV의 무슨 서바이벌 게임 즐기듯 '곽노현이 유죄냐, 무죄냐'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는 듯하다. 검찰과 언론이 그렇게 판을 만들어놓았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정작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아군'과 '적군'이 되어 쏟아내는 살벌한 비방뿐.

요즘 자신의 진로에 대해 나름 구체적으로 설계해놓은, '철든' 고등학생들에게 다가가 종종 물어본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를. 고작 몇십 명과 나눈 얘기를 일반화시키기는 조심스럽지만, 아이들의 꿈의 크기조차 가정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평짜리 임대 아파트에 엄마, 동생과 살아가는 상기(가명)의 꿈은 마트 주인이고, 최근에 지은 52평 아파트에 부모님과 맏아들로 사는 윤서(가명)의 꿈은 국회의원이다. 솔직히 인정하긴 싫지만, 상기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 친구 윤서와 같아질 수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다.
#곽노현 #선거기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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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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