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수 작가의 작품 속엔 부인 이여경씨가 종종 등장한다. 늘 함께 하는 이철수 작가 부부의 삶이 작품속에 스며든다.
이철수
귀농이란 말이 낯설었던 1986년, 그는 제천으로 내려왔다. 이유를 물으니 그가 "이젠 기억에도 잘 없는 거지만"이라면서도 "아마 사람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 욕심 사납고 자기 이해나 계산들이 따로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순진한 청년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단다. "요즘 같으면 아주 능구렁이처럼 대응할 텐데…"라고 그가 웃는데 모습은 여전히 '순진한 청년'에서 그다지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잠시 후, "여보, 나 왔어요" 하면서 부인 이여경씨가 작업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선다. 단발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모습이 꼭 소녀 같다. 옆집 베트남에서 온 새댁이 아이를 낳아 산모와 아이를 보고 오는 길이란다. 요즘 농촌에서 보기 힘든 경사다. "애가 얼마나 작은지 몰라. 태어날 때 2.5kg이었대요." 바로 앞에 갓난아이가 있는 듯 부인이 생생하게 소식을 전하고 그가 "건강하대요?"라고 묻는 부부의 대화모습이 정겹다.
그의 작품 '등 뒤에서'(1996)가 떠오른다. 부인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엔 '앓고 난 아내가 머리 묶고 일어나 앉았다. 조용하다. 무얼 보시는가? 묻지 못했다'란 글귀가 쓰여 있다. 아내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이 묻어난다. 이뿐 아니라 그의 작품 여럿에 그의 부인이 등장한다. 작품의 모델이 되는 것에 대해 부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별로 고마워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 평소에 잘 못하니까….(웃음) 일종의 이벤트라는 걸 아니까 별로 감동을 안 하죠. 감동은 바깥사람들이 더 하고…." 들켜버렸다. 무뚝뚝한 남편과 사는 기자와 같은 아줌마들이 많은가 보다. 그가 덧붙인다.
"어쨌든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산다는 걸 전하는 효과는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가정은 이런 무서운 세상을 사는데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라는 생각을 해요.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게 누구에게나 절실한 필요충분조건일 거라고 보고. 지쳐서 돌아왔는데 가정에서도 위안을 못 받고 평화를 찾을 수 없으면 참 불행할 거란 생각도 들고요. 나는 그래서 바깥일보다 가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가정의 평화도 없이 흰소리하는 분들, 별로 믿을 게 못 된다고 봐요."짓궂게 물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따로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질문이 무섭다며 그가 답했다. "몇 년 전부터 쉬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쉬러도 못 갔네요. 내가 그런 노력을 잘 못해요.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한국 남자들 일부를 대변하는 셈이에요. '마음은 있는데 늘 표현은 서투르고 모자라서 미안하다'고."
작업실 인터폰이 울린다. 점심 준비가 다 됐다는 부인 이씨의 연락이다. 작업실에서 본채로 가는 내내 받은 인상은 '정갈하다' '꾸밈없다'. 그 느낌 그대로 담고 있는 아담한 주방 안 식탁 위에 도자기 그릇 몇 개가 놓여있다. 널찍한 그릇 안에는 메밀국수가 담겨있고 반찬은 매실장아찌, 부추무침, 김치 등이다. 식탁 한편에는 옥수수도 있다. 동네 어느 집에서 줬다는 매실장아찌 빼곤 모두 이철수 부부의 밭에서 난 것들이다. 이런 식탁을 받는다는 게 행운이다. '감사하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부부의 대화가 다시 이어진다. "여보, 그 집 고부 간에 어려움 좀 있겠어." "왜요?" "말이 잘 안통해서 그런지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더라고." "이 장아찌무침 먹어봐요." "장아찌를 이렇게 무쳐서도 먹네." 일상적인 대화들인데도 계속 듣고 싶다.
"식사하면서 대화를 많이 하시나 봐요?"라고 물으니 "우리는 밥 먹는 시간보다 얘기하는 시간이 더 길어요. 평소에도 서로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하죠"라고 부인이 답한다. 처음에 제천에 내려왔을 때 부인은 안 힘들었을까. "충분히 서로 상의해서 내려왔는데 힘들기는요. 그리고 힘이 들면 서로 힘이 되어주면 되지."
어디를 가든 가능한 한 함께하려고 한다는 이철수 부부다. 낮엔 농사일을 같이 하고, 저녁에 그가 작업실에서 판화를 새기면 부인은 마늘 다듬거리 등을 갖고 와서 함께 이야기하며 서로의 일을 하기도 한단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장면이다. 이철수 부부처럼 살고 싶다고 주례를 부탁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뭇잎편지'로 전하는 이야기, 6만여 명이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