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8년 4월 21일 일왕을 만나 깍듯하게 인사하는 장면이 포착된 뉴스 화면
유투브 동영상 갈무리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상득 의원은 '일개 한나라당 의원'이 아닙니다. 이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이자 발언 당시 그는 국회부의장이었으며, 대화 상대자는 주한 미국대사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대통령의 성향이나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 대통령과 관련한 이 의원의 발언은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하며 또 주한미국 대사가 거짓말을 본국에 보고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말에서 '뼛속까지'라는 표현은 흔히 골수에 박힐 정도로 심신에 깊이 각인된 상태를 일컫습니다. 즉, 목숨을 걸고 갚아야 할 만큼 깊게 사무친 원한이나 혹은 특정 이념이나 사상으로 무장된 '주의자(主義者)'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제 경험으로 봐온 역사인물 가운데는 골수 친일파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더러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한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친일파 제1호' 김인승 '운양호 사건'이 발생한 지 6개월 뒤인 1876년 2월 4일. 강화도 초지진 앞 바다에 일본 군함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월 6일 일본 시나가와만을 출발해 부산을 거쳐 이곳에 도착한 이 군함에는 구로다 일행이 타고 있었습니다. 구로다는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강제로 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온 일본정부의 특사였습니다. 구로다 일행이 타고 온 군함에는 일본인 복장을 한 조선인이 한 명 끼여 있었는데 그는 김인승(金麟昇)으로 명분상으로는 구로다 일행의 '통역'이었습니다.
친일파연구가 임종국은 이 김인승을 '친일파 제1호'로 지목한 바 있는데, 그는 구한말 조선의 관리 출신이었습니다. 모종의 사건으로 조선을 떠나 러시아 니콜리스크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조선인 유민들의 자제를 가르치다가 일본인 첩자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의 앞잡이가 된 자였습니다.
김인승은 일본 외무성에 외국인 고문(顧問)으로 채용돼 '조선전도'를 그려 바치는 등 일제의 조선 염탐에 적극 협력하였는데, 그가 일본정부에 결정인 기여를 한 것은 구로다 일행을 도와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 협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약 체결을 위해 조선행을 앞두고 구로다가 김인승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번 수행에서도 만약 머리를 깎지 않고 의복을 바꾸지 않으면 이는 제가 조선인을 자처하는 일이며, 일본인의 입장에서 처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황국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어찌 고사하겠습니까?"김인승은 '일본인의 입장'에 처하기 위해, 즉 일본인이 되기 위해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나서서 따르겠다고 구로다에게 맹세하였습니다. 그 무렵 김인승은 이미 골수 친일파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대로 김인승은 구로다의 통역 신분으로 동행하였고, 구로다가 조선측과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군함에 머물면서 배후에서 '강화도조약' 체결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 그는 용도폐기 돼 러시아로 되돌아가면서 편지 한 통을 남겼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거리에서 듣기 불편한 말들이 들리고 길을 걸으면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역사 속에서 '친일파 제1호'라는 오명을 얻은 그가 배족(背族)의 대가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것은 멸시와 증오뿐이었습니다.
'창씨개명' 앞장선 친일파 춘원 이광수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제는 중일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조달 기지로 조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일제는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 주도자는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였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다음달인 그해 8월부터 미나미는 '내선일체'라는 미명 하에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봉창, 동방요배 등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후 10월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했으며, 12월에는 각급 학교에 일황의 사진을 배포해 경배케 하였습니다. 이듬해 1월 육군특별지원령 공포를 시작으로 5월에는 조선 전역에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했으며, 6월에는 근로보국대 조직을, 7월에는 전국 규모의 전시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창립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그해 4월에는 조선어 사용금지를 골자로 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는데, 그간의 모든 작업은 결국 '창씨개명'을 추진하기 위한 사전 기초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씨개명 작업은 단순히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차원을 넘어 종국적으로는 징병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총독부는 일본군 가운데 이아무개, 김아무개 등의 조선인 이름으로 불리는 병사가 섞여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