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실록수양대군이 이곳 창의문고개를 넘은 직후 1452년 3월 편찬 작업을 시작할 때는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가 찬수관이었으나 1454년 3월 편찬 작업을 완료할 때는 정인지 혼자였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서울대
조지소(造紙所)가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자하문 고개로 오르는 길이다. 종이를 만드는 데는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질이 좋은 고급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이 필요하다. 더구나 실록을 편찬하고 사초(史草)를 세초(洗草)하여 재사용하기에는 도성에서 가까워야 한다. 삼각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이 계곡의 물보다 더 좋은 물은 없었다.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면 사관이 배석했다. 왼쪽에 앉은 사관은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고 우측에 앉은 사관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오가는 말(言)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른바 좌사우언(左事右言)이다. 빈청에서 조정대신들과 어전회의가 열려도 마찬가지였다.
편전까지 사관이 따라붙자 태종은 임금의 사적 공간에 사관의 출입을 금했다. 민인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편전 계단아래 몸을 숨기고 임금의 대화를 채록하다 적발되어 귀양 가면서도 긍지를 가지고 떠날 만큼 사관은 자부심이 강했다.
이렇게 작성된 사초는 사관이 개인적으로 보관했다. 궁내에 보관하면 사초에 등장하는 높은 관직의 이해 당사자는 물론 임금도 열람해 보고 싶은 충동이 발동한다.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궁금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보면 수정하게 되고 수정하면 역사가 왜곡된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궁밖에 보관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