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발이 내려져 있는 임금의 자리. 김종서와 황보인이 3배수의 인물에 노란 표를 붙여 발 마래로 올리면 임금은 낙점하여 내려 보냈다.
이정근
인물 천거권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있다. 그 중에서 이조 전랑(銓郞)의 권한은 막강했다. 전랑은 정랑과 좌랑을 아우르는 말이다. 정랑은 정5품으로 품계는 낮으나 정승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들은 삼사(三司) 관원 중에서 특출한 사람을 뽑았는데 이들의 임명과 면직은 이조판서도 간여하지 못했다.
현재 임금이 어리다. 판단력이 미약할 것이라는 예단 아래 황보인과 김종서가 상의하여 3인의 후보명단을 올렸다. 그 중 하나에 노란 표를 붙였다. 황표정사(黃標政事)다. 임금은 그것을 낙점할 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인에게 관직을 제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하라면 할 뿐이었다. 황표정사의 폐해다.
이러한 폐단의 과실을 사신 떠나기 전 수양도 향유했고 안평도 만끽했다. 벼슬 하나 얻어 보려고 수양대군 사저와 안평대군 사저는 팔도의 내방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봉물은 차고 넘쳤고 미어터졌다. 수양이 없는 사이 안평과 김종서로 쏠림 현상이 도드라졌고 극에 달한 것이다.
"이미 엄자치를 보내어 수양대군을 의주에서 영접해 위로하게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또 안평대군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태종조와 세종조에는 왕자가 영접사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환관 엄자치를 의주에 보내 수양을 영접하게 하고 안평을 평양에 파견하려 하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반대했다. 수양을 추종하는 세력이 포진한 대간(臺諫)이 안평의 복심(腹心)을 읽은 것이다.
"안평대군에게 영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으니 다시 고칠 수 없습니다."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이 가세했다. 삼정승의 엄호다.
"대간의 청이 두 번이나 있었으니 따르소서."한확과 허후가 대간의 청을 거들었다.
"이미 길을 떠났으니 다시 돌아오게 하기는 어렵다."임금이 김종서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안평 진영의 승리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한 수양은 유쾌하지 않았다. 사신을 영접하러 의주에 간다고 잔뜩 바람을 잡은 안평은 보이지 않고 해괴한 소문만 나돌았다. 수양이 안평에게 편간을 보냈다.
"네가 평양에 닿았다 하니 빨리 만나고 싶다. 박천강 강상에 와서 기다려라."박천강에 유람선을 띄워 놓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한량스러운 아우에게 풍류를 주문한 것이다. 박천강은 평양에서 의주 가는 길목에 있는 청천강 지류다. 적유령산맥 대단층곡을 지나 묘향산맥의 구릉성산지를 흘러온 강은 청천강 유역의 3분지2를 차지하는 큰 강이다.
평양기생 소향이는 천하절색이었다평양에는 안평이 총애하는 기생 소향이가 있는 곳이다. 수양대군을 영접한다는 구실로 한성을 떠난 안평은 자신을 따르는 지지층에게 통이 큰 대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내면적으로는 소향이와 뜨거운 밤을 보내는 쾌락 삼매경에 빠진 것이다.
평양을 떠나 순안에 이른 안평이 말에서 떨어졌다. 많이 다쳤는지 아픈 척 하는지 본인만 알 수 있다. 종자 하석을 보내 답서를 전했다.
"말에서 떨어져 가지 못하겠습니다.""한양을 떠난 지 4일 만에 평양에 도착하여 기생을 끼고 세월을 허송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 또 몸이 다쳤다고 핑계를 대니 어찌 형제의 정이 있다 하겠느냐?"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순안에서 만났다. 서먹했다. 수양은 불쾌한 낯빛이었고 안평은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말에서 떨어져 고통의 그림자였는지 그것은 안평만 알 수 있는 개인적인 비밀이었다. 수양과 안평은 형제지만 정다운 얘기는 없었다. 삭막했다. 짧은 해후, 긴 이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는 이 때 이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수양은 한성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고 안평은 부상을 이유로 평양에 눌러 앉았다. 안평대군이 평안도 관찰사 정이한을 불렀다.
"피양 감사도 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소리가 있지요?"목소리를 나직이 깔았으나 위협을 내포하고 있었다. 안평이 눈 꼬리를 치켜 올리며 평안도 관찰사를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뎅겅' 날려버릴 수 있다는 눈빛이다.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정이한이 두 손을 비볐다. 춥다. 온몸에 추위가 엄습해왔다. 어떻게 딴 평양감사 자리인가? 이렇게 좋은 자리도 순간에 날아갈 수 있다니 온몸이 떨려왔다. 세종 14년(143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 정이한은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관료세계의 명암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뛰어나도 윗선에 줄을 대지 못하면 만년 변방직에 머물고 실력자에 붙으면 출세가도를 달린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세종 17년(1435)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그는 황보인에 붙어 평양감사에 올랐다. 이제 안평대군의 줄을 잡았으니 놓치지 않으면 판서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잠자코 있으면 됩니까?"안평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천하 명품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안평의 수염이 바람에 휘날렸다.
"녜, 녜, 지가 써 올리겠습니다."정이한이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여봐라. 지필묵 어디 있느냐?"잔뜩 움츠러든 정이한이 엉뚱하게 하인들에게 큰소리 쳤다. 하인이 붓과 먹을 대령했다.
"안평대군께서 수양대군을 영접하러 가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몹시 다쳤습니다. 가마를 타고 본 감영에 돌아와 의원을 부르고 약을 복용하며 조섭한 지 15일 만에 기체가 조금 호전되어 수양대군과 만났습니다. 그러나 쾌차하지 않아 수양대군과 함께 한성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그 정도면 됐소이다. 하 하 하"안평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평안도 관찰사 정이한이 작성한 장계가 급주마를 타고 한성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