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묘지자정을 전후한 시간 아이들을 태워오기 위해 정거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던 공동묘지. 미국의 오래된 마을은 보통 공동묘지가 동네 한복판에 있는데, 이 묘지는 외딴 곳에 있었다. 비가 내리는 한 밤중에 이 묘지 옆을 지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김창엽
야영장에서 선일이를 태우고, 다시 기차역으로 나온 건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선일이와 함께 슬로츠버그역과 서펀역 주변을 차례로 뒤졌다. 그러나 역시 병모의 자취는 없었다. 한 대뿐인 휴대전화는 윤의 손에 들려 있었다. 병모와의 연락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였다. 공중전화로 윤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저녁 때 잠깐 만났는데 잘 모르겠는데요." 윤의의 목소리는 불안정했다. 여자를 만나고 있을 시간이었는데, 뭔가 잘 안 풀리는 듯했다.
"병모가 지금 어디 있을 것 같으냐." 선일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병모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병모를 누구보다 잘 안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우리와 길이 어긋났다면 가까운 편의점이나 이런 데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병모는 큰 일을 만들지 않을 아이다. 우리가 이런 데까지 와서 뉴스에 나면 안 되지." 나는 횡설수설 이런 저런 말들을 입에 주워담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오만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은 오히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돈 몇 푼 아낀다고 이런 산속 야영장에 묵는 게 아니었는데…' ' 브롱스 나간다고 할 때 못 나가게 말릴 걸 그랬나.' '만일 정말 큰 일이 났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그렇잖아도 요 며칠 아이들 사이에 어딘지 미묘하게 편치 않은 기류가 감지돼 한편으로 좀 찜찜했는데, 뉴욕에서 큰 일이 생기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뉴욕 일정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면서, '아들 셋'은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따로 놀고 있었다. 이날만 해도 선일이는 맨해튼에 나가지 않고 야영장에서 쉬면서 노는 걸 택했다. 병모는 우범지대와 빈민가 '탐험'을 고집하고 길을 나선 참이었다. 윤의의 여자 친구 만들기는 처음에는 잘 될 듯하다가 헛물을 켜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뒷모습 "너 어떻게 된거야"... "죄송해요"병모를 찾는데, 선일이를 데리고 갔지만 비 내리는 한밤중에 선일이만 따로 둘 수는 없었다. 원래 생각은 선일이와 내가 서펀역과 슬로츠버그역을 하나씩 나눠 맡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늦은 밤 시간 텅텅 빈 역 주변의 치안상태가 불안했다. 둘 다 역무원도 없는 무인 정거장들이었다. 그래서 선일이와 나는 둘 중에서 좀 더 규모가 큰 서펀역의 주차장에서 함께 대기하고 있기로 했다. 다시 서펀역 주차장으로 차를 운전해 들어서는데, 멀리 곰처럼 큰 덩치를 한 남자의 뒷모습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희미한 조명 아래 벤치에 혼자 덩그러니 병모가 앉아 있는 거였다. 세상에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너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해요. 기차를 놓쳤어요. 폭우 때문에 기차 연결 편이 좋지 않았어요." 병모는 평소 여간해서는 남한테 미안해 할 일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 병모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나와 선일이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차에 올라 탄 병모는 처음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화도 나지 않았다. 너무 기뻤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