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상록수><상록수>에는 심훈이 쓴 단편소설 14편이 실려 있다
푸른사상
"'어떡하면 나머지 오십 명을 돌려보낼꼬?' / '이제까지 두말없이 가르쳐오다가 별안간 무슨 핑계로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한단 말인가?' 거짓말을 하기는 죽어라 싫건만 무어라고 꾸며대지 않을 수도 없는 사세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보아도 묘책이 나서지를 않아서 그는 하룻밤을 하얗게 밝혔다."-136쪽, '제삼의 고향' 몇 토막'오늘의 한국문학전집' 두 번째인 <상록수>에는 심훈이 쓴 단편소설 14편이 실려 있다. 쌍두취행진곡, 일적천금, 기상나팔, 가슴속의 비밀, 해당화 필 때, 제삼의 고향, 불개미와 같이, 그리운 명절, 반가운 손님, 새로운 출발, 반역의 불길, 내 고향 그리워, 천사의 임종, 최후의 한 사람이 그 작품들.
1930년대 농촌문제를 다룬 대표 소설 <상록수>는 그때 브나로드 운동 일환으로 <동아일보>사에서 주관한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응모해 당선된 작품이다. 농촌계몽운동을 주춧돌로 삼은 이 소설은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이 이 세상 작은 밀알이 되어 새로운 교육을 통해 지식이 없는 농민을 일깨우기로 마음을 다잡고 농촌에 젊음을 송두리째 바치는 내용이다.
이들은 강습소를 열어 문맹퇴치에 나서면서 일제 침탈을 거칠게 꼬집고 그 속내를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에게 자주독립사상을 심는다. 이 작품집 곳곳에는 '현실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작가 고민이 함께 담겨 있다. <상록수>는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일깨운다.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하나 둘 흩어져 있던 아이들은 영신이 돌아온 뒤에 신입생이 열씩 스물씩 부쩍부쩍 늘었다. 때마침 농한기라 어른들은 물론 오십도 넘는 노파가 손녀의 손을 잡고 와서는 '죽기 전에 글눈이나 떠보게 해주시유' 하고 진물진물한 눈으로 칠판을 쳐다보고 '가-갸 -겨-'하고 따라 읽는 것을 볼 때 영신은 감격에 가슴이 벅찼다." -333쪽, '내 고향 그리워' 몇 토막지금 우리 농촌은 1930년대와는 확실하게 다르다. 농민들도 깨어 있고, 농사짓는 법도 과학적이다. '웰빙바람'이 불면서 귀농인구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젊은이들이다. 농사짓기를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모두 떠난 농촌에는 노인들만이 전봇대처럼 외롭게 남아 있다. 지금 우리 농촌에는 <상록수>에 나오는 동혁과 영신이 필요하다.
동혁과 영신 같은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살면서 마지막 보루처럼 남은 우리 자연환경을 잘 보살펴야 한다. 강줄기를 틀어막는 4대강 사업이 누구를 죽이는 일인가를 농민들에게 일깨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대자연과 더불어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심훈은 1901년 노량진(당시는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대섭(大燮), 호는 '금강생'(金剛生) 또는 '백랑'(白浪). 이광수 장편소설 <무정>에 나오는 신우선 모델로 알려져 있는 큰형 우섭(友燮)은 <매일신보> 기자를 지냈으며 심천풍(沈天風)이란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심훈은 1919년 경성제일고보 4학년 때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하고 중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 뒤 귀국해 <동아일보> 기자를 하지만 1926년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퇴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무라타 미노루 감독 밑에서 영화수업을 받는다. 그는 그 뒤 '먼동이 틀 때'를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한다.
<조선일보> 기자, 경성방송국 문예담당으로 일하다가 1932년 부모가 살던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창작에 빠진다. 1934년 장편 '직녀성'을 연재하고 그 원고료로 직접 설계한 집을 지어 '필경사'(筆耕舍)라 이름 붙인다. 필경사는 지금 심훈문학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35년에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문예현상모집에 '상록수'가 당선되어 상금 500원을 받는다. 이듬해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장티푸스로 입원했다가 그해 9월 16일 불과 서른여섯이란 아까운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다.
일제 강점기, 그때가 과연 '태평천하'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