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이런 거 먹고 사는 거, 참 힘들어요

[내 삶의 밥 한 그릇③ - 밥은 '고국'이다] 한국음식 찾아 삼만리

등록 2011.09.11 11:16수정 2011.09.1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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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 한 교수님이 손수 차려준 저녁 밥상. 이웃 가족들 몇 집 모여 덕분에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우리 동네 한 교수님이 손수 차려준 저녁 밥상. 이웃 가족들 몇 집 모여 덕분에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이유경

"시누이가 김장을 한다고 해서 갔거든? 그런데, 배추 절여진 것부터 속까지 미리 다 만들어진 게 배달돼 온 거야. 그러니까, 그냥 양념 비벼서 배추에 넣기만 하면 돼. 하하하… 그게 무슨 김장이야?"


이건 절대로, 편해진 요즘 김장 담그기를 흉보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미국에 산 지 10년이 넘은 우리 동네의 한 언니(30대)가 마냥 부러워서 한 말이다. 작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다 돌아온 그녀의 이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한국인 주부들도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아침에 밥이랑 국이 집으로 배달도 된다며?"
"친구를 밖에서 만날 필요가 없어. 웬만한 건 집에서 다 배달 시켜 먹을 수 있으니."
"애들은 학원 가서 늦게 오고, 학교에선 급식 나오고, 남편은 집에서 밥 먹는 날 거의 없고… 주부들이 집에서 밥을 할 일이 거의 없지. 그러니 차라리 사먹는 게 나을 것 같애."
"뭐야… 애들 도시락에 남편 도시락까지 싸야 하는 나는…. 요즘 뭐 해먹고 살아요? 정보 공유 좀 해요~"

이런 얘기를 마땅치 않게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 경제적 여건과 생활 방식이 다른 데다, 이런 얘기는 마치 한국의 주부들은 부엌에서 해방되어 유유자적 여유로운 삶을 사는 반면, 미국의 한인 주부들은 부엌에서 얽매여 헤어나지 못한다는 편견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을 통하지 않고는 한국 음식을 해먹을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 반찬가게는커녕 한국 음식점도 없고, 작은 한국 식품점 한 두 곳에 의지해서 사는 나 같은 이들은 다양한 선택권이 있는 사람들, 한국의 주부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배달 음식 시켜 먹는 한국주부들, 마냥 부럽다

 코스코에서 파는 여러 종류의 쌀들. 이 곳에서 다행히 한국 사람들이 먹는 'short grain(길이가 짧고 찰기가 진 쌀)'을 구입할 수 있다.
코스코에서 파는 여러 종류의 쌀들. 이 곳에서 다행히 한국 사람들이 먹는 'short grain(길이가 짧고 찰기가 진 쌀)'을 구입할 수 있다. 이유경

 미국 대형 식품 체인점 중 하나인 프레드 마이어에서. 요즘은 웬만한 대형 식품점에는 '아시안 푸드' 코너가 있어 이렇게 쌀이나 간장 등을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먹었던 바로 '그 맛'의 제품을 구입하기는 어렵다.
미국 대형 식품 체인점 중 하나인 프레드 마이어에서. 요즘은 웬만한 대형 식품점에는 '아시안 푸드' 코너가 있어 이렇게 쌀이나 간장 등을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먹었던 바로 '그 맛'의 제품을 구입하기는 어렵다.이유경

올 8월로 12년째 미국 생활을 맞이한 나. 한인 인구 많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에서도 살아봤고 라오스 출신의 아줌마가 하나밖에 없는 한국 식품점을 운영하는 작은 도시에서도 살아봤다. 그리고 지금은 한인 인구는 제법 되나 한국 음식점은 없는 동네에 산다.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시카고, 애틀랜타, 시애틀 등 한인 인구가 많은 동네에는 대형 한인 식품 체인점도 즐비하다. 그리고 툭하면 '몇 달러 이상 구입시 10파운드 쌀 한푸대 증정!' 하는 식의 광고도 많고, 각종 반찬과 먹거리를 싸고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한인 인구가 적은 동네, 가령 예전에 살던 네브래스카 주의 한 동네는 사정이 달랐다. 어느날 내가 그곳에서 유일한 한국 식품점의 주인 아줌마에게 제품의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했다, 간 크게도. 그러자 아줌마는 "사지 마, 사지 마!(Don't buy, don't buy!)"라고 응수했다. 이게 바로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왕'이라고 하는 거다. 당시 우리 동네 한국 사람들은 불친절한 이 가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결론은 항상 "그래도 이렇게 가게 열어준 게 어디야, 감사해야지" 이랬다.

때문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우리가 뭘 먹고 사는지 걱정이 많으시다. 종종 전화 너머로 "먹고 싶은 반찬 있으면 말해. 보내줄게!"라고 하시지만, 번번이 그렇게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때문에 한인 식품점이 많은 대도시로 여행을 갈 일이 생기면 차에 가득찰 정도로 장을 봐왔다. 또, 출장 가는 남편에게 필요 이상의 큰 가방을 들려보내 가방 가득 한국음식을 장 봐오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살지 말고 그냥 미국 음식에 적응하라고 충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0여 년간 내 경험과 주변을 살펴보면, 어렸을 때부터 한국 음식, 밥을 먹고 자란 사람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다. 하물며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만 줄곧 쓰는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서는 피자에 마카로니 치즈를 먹을지언정 집에서 배고프면 미역국에 밥을 달라거나 김에 밥을 싸달라고 하니, 어쩌나? 글자 그대로 먹고 살려면, 한국 음식을, 밥을 해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런 탓에 이 곳에서 한국 음식은 그저 많은 종류의 음식들 중 하나로 끝날 수 없다. 어렵고 비싸게 마련한 재료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 바로 한국 음식이다. 또, 우리 동네로 갓 이사온 이웃의 가족들, 내 시름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친구들, 일주일을 끝내고 주말 저녁 편하게 함께 자리한 동료들, 멀리서 나를 보기 위해 달려와 준 친구에게 나의 각별한 마음을 전하는 표시다.

미국에서 순대 뽑아봤어요? 안 해 봤으면 말을 말아요

 친구가 만든 순대를 먹고 있는 딸아이. 시중에서 파는 순대와는 확실히 다른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아이는 그게 얼마나 귀한 음식인지 알까.
친구가 만든 순대를 먹고 있는 딸아이. 시중에서 파는 순대와는 확실히 다른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아이는 그게 얼마나 귀한 음식인지 알까. 이유경
"순대가 한 줄 밖에 안 돼요."

작년 한 겨울 이 곳에 이사왔을 때, 나와 이제 막 알기 시작한 한 친구는 집에서 손수 만든 순대를 먹으라고 가져다 주었다.

한국이나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몇 천 원 주면 쉽게 사먹을 수 있는 순대. 하지만 집에서 순대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케이싱과 피를 따로 주문해야 했고, 순대 속에 들어갈 잡채와 각종 양념을 일일이 따로 준비했다.

하지만 추운 겨울 새로운 곳에서 막 정착을 시작한 우리 가족에게 그녀가 준 그 마음 씀씀이란.

경남 산청이 고향이라는 우리 동네 한 언니도 그렇다. 이 분도 미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더위가 한 풀 꺾이기 시작하는 초가을이나 지루할 정도로 길고 추운 한 겨울의 어느 날, 아님 아무 특별한 일이 없을 때도 "밥 먹으러 와!"하고 전화를 한다.

그래서 가보면 항상 닭이나 멸치로 낸 뜨거운 국물에 야채를 듬뿍 넣고 직접 손으로 반죽해서 만든 칼국수를 말아주신다. 또 어떤 아저씨는 밤늦게까지 함께 와인을 마신 후, 다음 날 해장하라면서 자기가 끓여서 냉동해 두었던 김치찌개를 건네주기도 했다.

아마도 한국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마음이 이래서일까?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한국 학생 엄마들은 1년에 한 번씩 한국 음식을 준비해서 학교 선생님과 직원 모두에게 대접한다.

기부금을 내거나 학교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해 선생님과 학교에 대한 감사를 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곳 한국 엄마들이 선택한 방법은 밥을 해서 선생님들과 나눠먹는 것이다.

이는  내가 사는 이 곳의 한국 사람들이 특별해서는 아닐 것이다. 한국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이 어려운 탓에 도리어 밥의 소중함을 체득했고,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밥으로 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첫째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한국인 학생 엄마들은 1년에 한 번 음식을 준비해 학교 선생님과 직원 모두에게 대접한다. 음식 준비를 하고 남은 돈으로는 책을 구입해서 학교 도서관에 기증한다.
첫째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한국인 학생 엄마들은 1년에 한 번 음식을 준비해 학교 선생님과 직원 모두에게 대접한다. 음식 준비를 하고 남은 돈으로는 책을 구입해서 학교 도서관에 기증한다.이유경


 한국인 학부모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먹고 있는 학교 선생님들.
한국인 학부모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먹고 있는 학교 선생님들. 이유경

#밥 #미국생활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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