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태조 이성계 호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정근
중국은 그들의 법전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에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4명의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이성계가 네 명의 고려왕을 죽였다,'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등 4명 전부는 아니다'라는 역사적 논쟁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다'라는 부분은 명백한 오류다.
이인임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정치가다.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자 공황에 빠졌다. 이 때 공민왕에게 꽂힌 여인이 있었다. 승려 신돈이 총애하는 시녀 반야(般若)다. 임금이 체통 없이 야행(夜行)하여 불같은 밤을 보냈다. 그 후, 반야에게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모니노다.
공민왕에게 후사가 없자 이인임은 모니노를 옹립하여 우왕을 만들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모니노는 공민왕의 혈육이 아니라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인임은 이성계에 의해 경산에 유배되어 죽었다. 고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틀린 기록도 기록이다'라고? 고쳐달라고 애걸오류를 발견한 조선 조정이 정정을 요구했지만 중국은 묵살했다. 오기(誤記)도 기록이니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명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조선은 사신을 보내 정정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칙사가 오면 융숭하게 대접하며 바로 잡아줄 것을 부탁했다. 외교 수사로 정정이지 애걸하며 간청했고 엎드려 빌었다.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다.
그러나 명나라는 '틀린' 기록도 기록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더구나 틀린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이성계를 멸시하고 조선 왕실을 무시했다.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고 정종, 태종, 세종, 문종으로 왕통이 이어져 오는 동안 중국은 오기(誤記)를 무기로 조선을 굴복시키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았다. 굴종을 강요한 것이다.
수양은 중국이 명명백백한 오류마저도 정정하지 않고 그 '틀림'으로 조선을 압박하는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자신들이 잘못 기록한 오기(誤記)를 바로잡고 사과하기는커녕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는 크지만 작은 나라. 그 작은 나라의 소중화(小中華)됨을 기꺼워하는 조선. 뭔가 뒤틀려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중국은 가까이 하기엔 먼 나라군."수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까이 하면서 실(實)을 취하고 멀리 있으면서 의(義)를 행하면 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근실원의(近實遠義)라?""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그렇다고 강토를 싸가지고 옮겨 갈수야 없잖습니까?""어려운 숙제군."수양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조선에서 보던 하늘과 똑같은 하늘이었지만 더 커보였다.
'우리 임금이 우리 힘으로 용상에 올랐는데도 등극을 승인해달라는 고명(誥命)을 받기위해 국경을 넘어가는 나?'수양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