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 강동균 회장이 경찰에 체포되는 장면이다. 당시 경찰은 사복 체포조 수 십 명을 동원하여 공사 현장에서 강회장을 체포했다. 그는 지금 감옥에서 외롭고 고단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누가 그를 위로해줄 것인가?
강정마을회 제공
강정마을 강동균 회장이 지난 24일 저녁 경찰에 연행된 후, 두 명의 연행자와 함께 구속 수감되었다. 그를 구속하는 과정에서 정부당국은 검찰, 경찰청, 국정원, 국군기무사령부 등의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공안대책협의회를 개최하기까지 했다.
공안이란 '공공의 안녕'의 줄임말인데, 강동균 마을회장이 공공의 안녕을 해칠 만한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시 그가 한 행동이란 공사가 불법인지 합법인지 확인하고 공사를 시행하라고 요구하며 크레인에 잠시 오른 것뿐인데 말이다.
난 오래 전부터 강동균 마을회장을 지켜봤고, 마을 주민들과 그의 친구들의 입을 통해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강회장이 연행되던 날, 팔순이 가까운 마을 어르신이 나에게 "우리 마을회장 참 딱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어르신은 "마을회장의 선친이 학교 교사였는데, 교통사고를 당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며 그의 회한 많은 삶을 전했다.
얼마 전 강정마을에 오키나와 평화 운동가들이 방문한 적이 있는데, 강회장이 그들과 일본어로 어려움 없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았다. 이는 그가 10여 년 전 일본에서 노무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강회장은 재산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 농사를 짓다가 빚이 늘자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서 노무자 생활을 했고, 손에 현금이 조금 모이니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일본에서 모아 온 돈도 집안에 일이 있어서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고향에서 사는 동안에도 과수원을 임대받아 귤농사를 지었고, 아내와 함께 틈나는 대로 일용직 노동을 했다. 그러는 사이 두 아들은 학교를 졸업하여 직장을 잡았고, 가정도 안정이 되었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문제가 거론되기 이전까지 얘기다.
그런데 마을이 해군기지 논란에 휩싸였다. 2007년 8월에 마을 주민들은 해군기지 유치 청원서를 제출한 윤아무개 마을회장을 해임하였다. 그러고 나자, 마을에는 후임 마을회장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도 마을회장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마을 원로들이 강동균씨를 찾아가 후임 회장을 맡아 줄 것을 당부했는데, 강회장의 부인이 한사코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노동을 안 하면 생활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이런 일을 맡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였다.
그런데도 마을 주민들은 설득에 설득을 반복했고 마을이 처한 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지라 강회장이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임시총회에서 그는 새로운 마을회장으로 선임됐다. 마을 회장이 된 후 그는 항상 해군기지 싸움의 최전선에 섰다.
아들 집을 밤새 오간 노모, "단식 당장 그만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