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이 'V'자를 그리며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주빈
그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나는 구럼비 바위에 앉아 시인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을 읽고 있었다. 시집의 74번째 시는 '바다가 우는데 우리는'이었는데 그날따라 가슴에 감겼다. 낭송하자면 이런 시다.
"바다가 우는데 우리는 바다의 목구멍을볼 수가 없구나 薄明(박명)의 해가 도장 찍는헐어빠진 바다의 몸에 흰 고름 같은 물결,차갑게 식는 바다의 몸에 고이 다가오는밤은 결 고운 안동포 壽衣(수의)를 입히는구나."
강정마을 현장취재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껴안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뉴스 한 줄에 쥐구멍에 드는 햇볕 쬐듯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진을 치고 달려오는 해군과 경찰의 거친 몸짓을 보면 다시 절망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질려서 포기하는 것'인 줄 알지만 사람인지라 희망과 절망은 반복되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가 뉴스에 나오면 나올수록 해군과 경찰의 압박은 드세졌다.
여야는 처음으로 국회 예결위원회에 소위원회를 꾸려 강정마을 해군기지사업과 관련한 예산집행 문제를 조사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야당들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대신 '강정마을 평화공원'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해군과 경찰의 대응은 거꾸로 갔다. 해군은 경찰을 앞세워 태풍 피해복구로 여념 없는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공사를 해야 겠다'고 밀고 들어와 주민들을 자극했다. 경찰은 한 술 더 떠 '육지 경찰' 약 600여 명과 물대포 3대, 시위진압장비 10대 등을 배에 싣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강정바다는 '결 고운 안동포 수의를' 입는 섬뜩한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저들은 '결 고운 안동포 수의'는 고사하고 시멘트 삼발이를 가득 채워 강정바다를 익사시키려 하고 있다. 강정바다는, 그리고 그 바다의 평화는 무사할 수 있을까. 저들은 미리 짜둔 죽음의 관 같은 20미터가 넘는 케이슨을 강정바다에 쑤셔 박을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다.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은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나란히 맞서는 정점의 시간에 마을로 돌아왔다. 무엇이 희망의 징조고, 무엇이 최악의 징후인지 구분하기 힘든 살얼음 국면이었다.
"강정마을이 처음으로 전국 뉴스에 나오기 시작했어요. 4년 만에 처음으로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가 강정마을과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적인 문제가 된 것이죠. 이제야 비로소 가느다랗게 희망이 보이고 있어요. 이 싸움은 해군기지 반대싸움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싸움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사람들이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는 시간입니다.
특히 우리 강정마을 주민들에겐 이 싸움의 과정 자체가 상처를 치료해가는 과정이에요. 억압과 수탈을 당하며 모질게 4년 동안 살아오면서 입었던 상처 하나하나를 치료해나가는 과정이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고 상처를 쓰다듬어주면서 치료해가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이 싸움은 결국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위대한 승리의 길입니다." 그는 "해군과 경찰이 보여주는 현실은 최악의 상황"이라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본다"고 했다. "그들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작은 희망의 끈만 놓지 않으면 결국 저들 스스로 무너지게 돼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을 맡아 옥살이까지 마다않고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 일로 귀향한 것은 아니었다. 2008년 10월, 그가 고향 강정마을로 돌아온 것은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여느 시골 노인네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서울로 모셔가기만 하면 도망치듯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석 달을 버티셨다. 그러나 두 번째 오셨을 땐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고향으로 가시고 말았다. 정담 나눌 이웃 한 명 없는 '서울살이'는 아무리 자식집이더라도 귀양살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고 만다. 큰 병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것이었다. 다른 병으로 쓰러졌다면 입원해서 치료하면 될 일이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영양실조로 쓰러지다니…. 그의 마음은 더욱 쓰렸다.
"그저 어머니 곁에 있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강정으로 돌아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강정해군기지 얘기는 들었는데 갈등상황은 전혀 모르고 내려왔지요. 와서 보니 마을이 너무 처참하게 깨져 있어요. 동창들 중에도 찬성하는 친구들과 반대하는 친구들이 모두 죽마고우인데 서로 인사도 안 하드라구요. 만나도 신경전 비슷하게 하고요. 그래서 친구들이 '해군기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처음엔 '아무 입장 없다'고 둘러댔어요. 고향 친구들과 결별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일주일을 살아보니 인간 세상 아닌 거예요. 그때까진 아직 동창회가 살아있어 동창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즐겁지가 않아요. 이런 식으로 주민들을 이간질시키고, 갈등하게 만들어서 공동체를 완전히 분해시키는 국책사업이라면 어떤 타당성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