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국가에서 '교황 방문 비판' 대규모 시위

스페인 시민 수천 명 "내 세금 교황에게 한 푼도 못 써"... 일부 성직자도 동참

등록 2011.08.18 18:07수정 2011.11.16 20:28
0
원고료로 응원
a

스페인 시민 수천 명이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방문을 비판하는 시위를 열었다고 보도한 BBC. ⓒ BBC


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교황의 방문을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스페인은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나라다. 16~17세기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종교 개혁 및 종교 전쟁 때에도 스페인은 프로테스탄트에 맞서 가톨릭을 옹호하는 지주 역할을 했다.

그런 나라에서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의 방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근래 스페인을 덮친 경제 위기와 관련이 있다. 경제 위기로 스페인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이때, 스페인이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교황 방문이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스페인을 방문하는 이유는 수도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를 참관하기 위해서다. 세계청년대회는 가톨릭 청년 축제로 16일(현지 시각)부터 6일간 열린다.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약 100만 명이 마드리드로 온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BBC와 <로이터통신> 등 외신을 종합하면, 교황 도착을 몇 시간 앞둔 17일 밤(현지 시각) 마드리드의 중심부인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수천 명이 모여 '많은 비용이 드는 교황 방문'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내 세금을 단 한 푼도 교황에게 쓸 수 없다"고 외치며 행진했다. 시위 참가자 중 하나인 로사 바스케스(55)는 "교황 방문은 좋지 않은 시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에 많은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시위대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가로질러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려 하면서,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됐다. 경찰이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시위대를 '정리'하려 하자, 일부 시위대는 물병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에는 동성애자 인권 운동 그룹과 가톨릭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비롯한 100여 개 그룹이 포함돼 있었다. 이 중에는 경제 위기로 인한 정부의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15-M 분노하는 사람들' 구성원들도 있었다.

'15-M 분노하는 사람들'은 성명을 통해 교황의 이번 방문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우리는 교황의 방문 자체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스페인 사람 중) 일부는 교황 방문에 찬성할 것이고 다른 일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화가 난 건 교황 방문에 (스페인의) 공공 자금이 쓰인다는 것 때문이다. 그것도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해 수많은 사회 서비스가 감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판자들 "교황 오면 큰돈 든다" - 행사 주최 측 "경제 효과 1억 유로"

교황의 방문을 문제 삼는 건 이들만이 아니다. 가톨릭의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톨릭 성직자인 에바리스토 빌라르는 "우리는 교황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가 오고 실업률이 높은 때 이처럼 돈이 매우 많이 드는 행사를 하는 것에 항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500만 명이 실업자인 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행사를 열 곳은 없다"고 덧붙였다.

빌라르가 속한 '성직자 포럼'은 교황 방문으로 스페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경호 관련 비용을 빼고도 6000만 유로(약 930억 원)로 추산된다며, 교황 방문을 비판했다. '성직자 포럼'에는 마드리드에서 가난한 교구를 맡고 있는 성직자 100여 명이 속해 있다. 이들은 교황 방문 비용뿐만 아니라 이번 행사에 대한 기업의 부적절한 후원도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말처럼, 스페인은 최근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실업률이 21퍼센트에 달하는데, 이는 유럽연합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높은 실업률과 긴축 정책에 항의하는 대중적인 시위가 몇 달 동안 계속됐다.

교황 방문을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진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은 경제 위기 관련 시위의 중심지이자 상징이다. 경제 위기와 관련해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이 지난 5월 이 광장을 점거하기도 했다.

교황 방문 비용 이외에도, 세계청년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대중교통 요금 특별 할인도 논란이 되고 있다. 경제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지하철 등 대중교통 요금이 50퍼센트 인상된 마당에, 가톨릭 행사 참가자들에게 특별 할인을 해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세계청년대회 주최 측은 행사에 들어가는 돈의 상당 부분을 자체적으로 마련하고 있으며, 행사의 '경제 효과'도 크다고 반박하고 있다. '경제 효과'와 관련, 대회 주최 측은 이 행사를 통해 스페인 "납세자들이 한 푼도 내지 않고" 1억 유로(약 1550억 원) 정도의 경제 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대회 주최 측이 주장하는 경제 효과에 상응하는 금액이 행사 관련 비용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교황이 방문하면 수천 명의 경찰을 마드리드에 추가 투입해야 하는 등 스페인 당국의 비용 부담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9월 영국을 방문했을 때도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성직자들의 성 추문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 동성애자 권리 등의 사안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를 이유로 교황의 방문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편 스페인 경찰은 17일(현지 시각), 교황 방문을 비판하는 시위대에 대한 가스 공격을 계획한 혐의로 멕시코 출신 학생을 체포했다.

경찰은 화학을 공부하는 이 학생이 "사람을 질식시키는 가스 및 여타의 화학 물질"로 시위대를 공격하려 했다고 보고 있다. 경찰은 이 학생의 아파트에서 전공 분야와 상관없는 화학 방정식들이 담긴 노트북 2대와 외장하드를 압수했다.
#스페인 #교황 #베네딕토 16세 #경제 위기 #가톨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주민 몰래 세운 전봇대 100개, 한국전력 뒤늦은 사과
  2. 2 "곧 결혼한다" 웃던 딸, 아버지는 예비사위와 장례를 준비한다
  3. 3 길거리에서 이걸 본다면, 한국도 큰일 난 겁니다
  4. 4 전장연 박경석이 '나쁜 장애인'이 돼버린 이야기
  5. 5 파도 소리 들리는 대나무숲, 걷기만 해도 "좋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