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자서전
삼인
그리고 1997년 12월, 5년 전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별 못했던 그 통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전화하고, 전화했다. 넉달 전 나와 한 몸이 된 경상도 태생 아내도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고, 밤을 새웠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유세에서 "내일 이 나라의 정권이 교체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탄생합니다. 고난의 시대가 끝나고 희망의 시대가 시작됩니다."(1권 673쪽)고 외쳤다.
그 외침이 내 마음을 때렸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날 밤 "대통령, 김대중"이 온 나라에 울려 퍼졌고, '김대중 당선자'가 "서민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여 우리 경제가 민주적 시장 경제로 발전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을 보면서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5년 전 '통음'은 '희열'로 변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살았던 시간은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 그리고 경제 식민지였던 IMF, 남북정상회담이라는 20세기 대한민국 역사를 관통하는 삶이었다. 여든 살이 넘은 사람들이 다 경험한 시간이었지만 김대중은 달랐다.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남북정상회담까지는 대한민국 현대사 중심에 서 있었다. 박정희는 3선 개헌과 납치, 유신독재로 독재자와 민주주의를 유린하였고, 김대중은 저항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독재자로서 반민주 상징이었고, 김대중은 민주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독재의 살기는 갈수록 독했다. 긴급조치는 모든 분야에서 의욕과 희망을 거세해 버렸다. 사람들은 실어증에 걸린 듯 말을 잃었고, 지식인들은 자기 검열에 걸린 자신을 발견하고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당시의 침묵 속에는 온갖 수모가 들어 있었다."(1권 349쪽)고 회고했다. 살기가 넘치는 정권, 곧 '병영국가'였다. '살기'와 '병영국가', 박정희 정권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병영에는 사실 죽임이 난무하는 곳으로 살기가 넘친다.
김대중 "독재자 박정희 정권은 '병영국가'"민주주의는 '살림누리'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어 살기 넘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민주주의를 거세한 박정희, 그는 독재자였다. 김대중은 자서전 곳곳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 박정희"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박정희가 독재자는 맞지만 경제를 발전시켰다면서 그를 추켜세운다. 살림누리를 살기가 넘치는 병영국가로 만들었는데 추켜세우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기에 김대중 생각은 조금 다르다. 박정희가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를 신봉했던 민주정부'였다. 그래서 말한다. "만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장면 정권이 경제 부흥을 추진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장담을 할 수 없지만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로 더 높은 효과를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장면 정부를 무능하다고 비판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 경제정책은 장면 정부가 세운 터 위에서 출발했고 그 열매를 따 먹고서 박정희가 다 이루었다고 자랑하고, 추켜세운다.
박정희가 밥 먹여주었다에 속지 말아야, 그는 독재자일 뿐그렇다. 독재자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맞지만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았다. 배고픔은 해결했지만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함께 이루어졌다면 1997년 IMF는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대기업 위주 정책과 정경유착은 결국 한국 경제 뿌리를 뒤흔들었고, 인민들은 고통과 눈물로 통곡으로 21세기를 맞아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첫 일성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드러나게 났고, 박정희가 남긴 IMF를 극복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함께 갈 때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민주주의를 배반한 박정희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고자 했던 김대중은 격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독재자 박정희는 민주주의 신봉자 김대중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박해가 통하지 않자 '부통령' 자리를 주겠다는 회유도 서슴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하고, 배반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힘의 원천은 신념인 "행동하는 양심" 때문이다. 이것이 김대중을 김대중답게 했고, 수없이 변절해간 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난 좋은 자리에 가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1권 301쪽)이 대목을 읽는 순간 머리를 때렸고, 가슴을 저몄다. 모든 독재가 내가 '아니면'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김대중에게 독재자 박정희 핍박보다, 인간 근본을 뒤흔드는 '유혹'을 더 이겨내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유혹을 이겨냈다. 그러기에 김대중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투쟁했던 김영삼이 쿠데타 세력과 손잡자 "그 쿠데타의, 야합의 주역이 김영삼씨였다는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왜 역사에 버림받을 길을 선택했는지는 한때 민주화 동지로서 지금도 안타깝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보다는 집권 욕이 앞섰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1권 571쪽)고 회고한다.
김대중, 야당 야합한 김영삼 때문에 가슴 도려내는 아픔 겪어이 내용을 말할 때 김대중은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온 몸을 휘감았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유린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권력에 눈멀어 사상과 신념, 민주주의를 저버리는 일은 용서받기 힘들다. 이유는 그를 따랐던 수많은 인민들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독재자로 처음부터 살았던 자들보다, 독재자를 비판했던 이가 민주주의를 유린한 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앞으로 이런 자들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아직도 김영삼은 야합에 대해 한 번도 인민 앞에 사죄하지 않았다. 김영삼을 용서하기 힘든 이유다.
그러나 김대중은 함께 했던 민주동지가 변절하고 독재자들이 그를 핍박하고, 박해하고 회유할지라도 김대중이 변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김대중이 강조했던 '행동하는 양심'을 통하여 민주주의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그러기에 전두환이 그를 아무리 회유해도 마지막까지 그에게 굴복하지 않고 양심을 택했다. 그는 마지막 진술에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