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구후 주변의 여러 소수민족들이 이용하는 용닝시장에서 만난 돼지. 한마리가 아니었다. 잠깐 서 있는 동안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주워먹고 다니는 돼지 세마리를 봤다. 여러 마리의 닭도 봤다. 이들은 알아서 집에 들어간단다^^
김현자
사랑 나눌 짝 찾는 축제...우린 한패가 되어 놀았다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낀 루구후에서의 두 번째 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저녁을 서둘러 먹은 후 5분 남짓 걸어 모서인들이 춤추고 놀며 사랑을 나눌 짝을 찾던 등불야회를 보러 갔다. 아니 즐기러 갔다. 우리가 갔을 때만해도 한산했던 마당이 조금 후 등불야회를 보러 온 중국 관광객들로 가득 차 북적이기 시작하자 등불야회가 시작됐다.
모서인들은 마당 한가운데 불을 놓고 우리의 강강술래처럼 둥글게 돌며 춤을 추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들이 각각 패를 지어 남자는 발을 구르고 여자는 손뼉을 치며 놀기도 했는데, 언뜻 이들의 춤은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관광객들에게 두세 가지 정도의 스텝만 보여주기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 실제로는 수십 가지의 스텝을 복잡하게 즐기며 놀았단다.
등불야회에서 부르는 노래는 구애 혹은 사랑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춤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모서인들과 관광객들이 공연배우와 구경꾼으로 나뉘었는데, 나중에는 모두 섞이어 한패가 되어 놀았다. 우리 일행도 모서인 전통복장을 입고 그들과 섞이어 놀았다.
등불야회가 끝나고 보니 인근에 관광차 5대와 승용차 여러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세 번째 마을의 이 축제가 외부인들에게 알려지자 바깥세상과 훨씬 가까운 첫 번째 마을에서도 얼마 전부터 재현하고 있는데, 극장에서 관람만 하는 형태라 함께 어울리고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마을보다 훨씬 먼 이 마을로 오고 있기 때문이다.
"완회(등불야회)가 열리는 날에는 집집마다 무조건 두 명씩 참여를 해요. 축제로 번 돈을 한 달에 한번 공평하게 마을 사람들이 나누는데, 가계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리장이나 인근 도시로 돈 벌러 나가 고생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고 하네요. 객지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죠."
축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행을 이끌고 있는 국제민주연대 미성씨가 등불야회에 얽힌 이야기를 묵묵한 감동이 실린 목소리로 짧게 들려줬다. 미성씨의 말을 들으며 어린 시절 자주 봤던 정경들이 떠올라 시큰해졌다. 먹고 살기 힘들던 70~80년대 돈 벌러 객지로 나가 명절 같은 때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안고 돌아오곤 하던 동네 언니들이 떠올라.
최정규 작가의 권유로 재현한 마을 축제, 대박 났네불과 3년 전만 해도 등불야회는 모서인들만의 작은 축제에 불과했단다.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짝을 찾는 젊은이들이 점차 늘면서 그들 사이에서도 차츰차츰 잊히고 있는. 어느 날 마을에 낯선 이방인이 들어와 주기적으로 여행자들과 함께 마을을 찾을 테니 그들에게 보여줄, 함께 즐기며 놀 수 있는 전통문화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청년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마을을 찾는 외부인이라곤 어쩌다 한두 명, 그것도 루구후 호수를 바라보며 스쳐지나가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서 잠을 자고 머물며 우리들이 춤추고 노는 것을 보여주면 돈을 주겠다고? 정신 나간 사람이 공연히 해보는 소리 아냐?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이때 낯선 이방인에게서 진정을 느낀 짜빠· 짜시 형제가 마을 청년들을 설득해 오늘날과 같은 등불야회를 재현하게 됐고, 돈 나올 구멍이라고는 도무지 없던 이 마을을 살리는 주요 수입원이 된 것이다. 그 이방인이 국제민주연대 공정여행 프로그램 개발도 하고 공정여행을 직접 이끌고 있는 최정규 작가. 그때 그는 당시 외부인이 거의 가지 않는 낯선 루구후를 하루 꼬박 걸려 찾아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발걸음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들의 지나친 이기라고 생각해요. 보셔서 알겠지만 마을에 TV가 들어와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들도 알거든요. 그럼에도 어쩌다 찾는 여행자들을 위해 가난하고 불편해도 참고 살아달라는 것은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는 거지요. 이들에게는 아이들의 미래가 달린 일인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