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진재화가 가야하라 하쿠도가 그린 관동대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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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이 일어나던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군수물자의 조달을 위해 식민지 조선뿐 아니라 일본의 민생을 쥐어짜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쌀파동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기를 드는 국민들이 늘어갔다. 또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일본 노동자와 이주조선노동자들과 연대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의 3·1운동을 경험했던 야마모토 곤노효우에 내각은 지진으로 인한 재난이 엄습한 상황에서도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일망타진하고 정국을 장악할 계기와 명분에 골똘했다.
결국 지진발생 6시간이 지나면서 야마모토 내각은 군대와 경찰, 그리고 민간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엄령 발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군 무선망을 통하여 터무니없이 "제도(帝都)에 적(敵)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물에 독을 풀고, 지진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살인·강도·강간·방화를 일삼고 떼로 몰려다니며 마을을 습격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신문은 또한 이 유언비어를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조작해 그야말로 조선인 폭도들이 간토지방에서 내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왜곡 보도하기 시작했다. 조선인에 대한 불안한 민심을 조장하는 데 성공한 야마모토 내각은 결국 이를 빌미로 계엄령을 발포하고 각 마을마다 자경단을 조직하여 '제도의 적'을 색출하였고,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다.
관동대진재와 제주4·3의 유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