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참석했던 아버지학교의 모습.
강수정
첫 주와 둘째 주를 거쳐서 남편은 출근과 퇴근시마다 아이들에게 포옹을 해 주었고 퇴근이후에도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서 아이들과 함께하였다. 아이들도 아빠가 아버지학교에 다녀서 전에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어색해 하면서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남편은 아버지학교에서 매주 내주는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첫 주는 아버지에게 편지쓰기, 둘째 주는 아내에게 편지쓰기와 아내가 사랑스러운 이유 20가지 적어오기, 셋째 주는 자녀에게 편지쓰기 등 이런 숙제를 하느라 매주 서 너 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하였다.
아버지학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직업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아버지라는 직위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버지들에게 일과 직장에 전념하고 돈을 벌어다 주는 것만이 아버지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아이들과 대화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도록 강조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많은 아버지들이 직장 일에 전념하여 일중독이 되는 것이 전적으로 의식부족 때문이었다면 이런 교육으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겠지만 슬프게도 구조적인 문제가 의식부족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들이 아직도 가정과 가족의 요구와 흐름에 무관하게 오로지 일과 직장에 집중해야만 훌륭한 직장인으로 인정받는 현실적 구조 말이다. 가정 관리를 전적으로 맡아줄 협력자(전업주부 아내 또는 헌신적인 어머니)를 가진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직장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들을 협력자 또는 희생자로 남도록 요구하는 '이상적 근로자' 구조에 어떤 획기적이고 혁명적 변형을 가하지 않는 한 이러한 교육과 가르침은 일시적 구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들의 의식을 최대한 끌어올려 아내와 자녀와 함께 소통하는 아버지에 대한 상을 갖도록 해주는 교육은 환영 할만한 일이었다.
드디어 5주 동안의 모든 과정을 끝내고 수료식을 하는 날이었다. 수료자의 아내들이 조별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고 한 조원의 아내라는 분이 전화를 하여 내가 맡을 부분을 전달해 주었다. 나는 '아내들이 어머니학교를 듣고 수료할 때도 수료식 날 남편들이 전화로 협력해 음식을 준비해 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직도 여기는 전통적인 성역할이 너무 자연스러운 곳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내가 맡은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꽃다발을 사가지고 수료식장으로 갔다.
결혼 초기부터 맞벌이를 해왔던 우리부부는 가사를 함께 해 온 지 오래 되어 설거지나 빨래하기와 개기, 청소, 음식준비 등 거의 못하는 가사가 없는 남편은 아내가 자기 수료식에 조원들과 나눌 저녁식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소풍가는 날 엄마가 자신을 위해 김밥을 싸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겉절이를 준비하고 호박전을 부치고 깻잎 전을 부쳤다. 나에게 할당된 것은 배추 겉절이였지만 더 풍성하게 나누고 싶어서 추가로 봉사정신을 발휘했다.
다들 맛있는 음식들을 정말 풍성하게 준비해 왔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다시 교육장으로 모여 몇몇 참가자들이 아내에게 쓴 편지를 공개했다. 장안을 눈물바다를 만든 게 한 사례도 있었고 엄마와 딸이 함께 합심해서 교회에 다니지 않던 아빠를 아버지학교에 등록해 앞으로 신앙인으로 살겠다는 약속이 담긴 편지글을 발표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다.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자주 들었던 발표자들의 소감이나 아내에 대한 애정표현을 할 때에 마음에 걸리는 표현들이 있었다. "아내가 본인의 다른 의지에도 불구하고 내게 순종해 줘서 고맙고 사랑스럽다"라는 식의 말과 "아이들을 잘 챙겨줘서, 늘 맛있는 요리를 해 주어서" 등 전통적 성역할을 그대로 인정하고 찬미하는 듯 한 표현들이 불편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 속에 이미 습관화 되어 있어 그런 것을 어쩌겠나하는 마음에 그냥 웃어 넘겼다.
아내가 성관계를 거부하면 아내를 죽이고 싶다더라? 발표가 끝나고 강사의 주제 강연을 듣고 나서 남편들을 모두 내보내고는 아내들만 앉혀 놓고 교육장을 제공한 교회의 담임목사라고 소개된 그 강사분이 '아내의 역할' 이란 주제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 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남편의 머리됨에 순종하라. 2. 남편을 존경하라.3. 남편을 요부처럼 사랑하라.4. 집안일에 최선을 다하라.5. 성을 무기로 쓰지 말라6. 남편은 아내하기 나름이다.7. 돕는 배필로 살라.이 들 중 1번과 5번에 대한 설명에 충격을 받았다. 다음은 목사님의 1번과 5번에 대한 설명을 메모했던 것에 기초하여 옮겨 적어 보았다.
1. 남편의 머리됨에 순종하라!남편들의 권위에 순복하라. 남자는 특성적으로 서열의식이 강하다. 그게 한국적 정서이다. 그러니 남편에게 뭔가 집안일을 하게 하려면 주장하지 말고 청유형으로 해라. 나도 한 때 아내가 "여보, 이렇게 바쁜데 청소도 안 도와줘요?"라고 했을 때는 청소기를 13층에서 던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보 이렇게 바쁜데 청소 좀 해주면 어때요?" 라고 부탁하듯 말하면 약한 아내를 도와주고 싶어진다. 아내들이 연약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청유, 제안 형으로 해야 남편들이 잘 도와준다. 모두 아내의 할 탓이다. 5. 성을 무기로 쓰지 마라!(고린도전서 7장 4절)남편이 성관계를 원하면 발로 차지 마라! 여러분이 내키지 않더라도 아프거나 몸에 문제가 있지 않는 한 남편이 원할 때 그냥 해줘라! 남자는 하나님이 주신 생리적 본능이 그렇게 생겼다. 참지 못한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매춘부를 찾게 되어 있다. 남자들 홧김에 그런데 가면 100만 원 200만 원씩 쓰기도 한다. 왜 돈을 그런 데 쓰게 하냐? 나는 목사지만 심리학 박사로서 부부상담,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가해자 상담도 하는데, 어떤 조사에 의하면 많은 남편들이 본인들이 성관계를 원할 때 아내가 거부를 하면 아내를 죽이고 싶다고 한다. 여러분 남편이 어디 더러운 데 가서 매춘부랑 성관계하고 또 몹쓸 병이라도 걸리고 그러면 어쩔 거냐.아버지학교 수료식장에서 이런 강의를 듣고 앉아 있는데 내 안에서 참을성의 한계가 느껴졌다. '아, 이건 뭐지? 우리 대한민국이 이 정도 수준밖에 안되나? 아님 대한민국 전체가 그런 게 아니라 기독교가 그런가? 아님 아버지학교의 수준이 이런 것인가? 이건 완전 인권침해를 종용하고 가르치고 정당화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 강간을 합리화 하는 저런 말이 아버지학교의 강사에게서 나오다니!'
'남편의 머리됨에 순종하라!'는 내용도 아내들 본인의 인생에도 그렇고 딸들의 교육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이데올로기이다. 여성들에게 연약함을 강조하여 늘 남편에게 가사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제안하라는 것은 가족 안에서 남편과 아내 간에 수직적 상하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고 어찌하면 부드럽게 남편의 협조를 이끌어 낼 것인지를 가르치는 구시대적이고 여성차별적인 논리이다.
이처럼 뒤통수 맞은 느낌을 어찌하지 못하고 며칠이 지났다.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기사 내용을 찾아 읽어보니 그 목사님의 강의 내용이 다시 떠올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극우 민족주의자이며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밝힌 테러범은 테러 전에 인터넷에 올린 선언문에 한국을 언급하며 다원주의 다문화주의 성평등주의가 문제이고 이에 반대하며 가부장제가 제대로 구축 되어 있는 한국이나 일본같은 나라가 미래의 대안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목사이며 많은 사람을 교육시키는 위치에 있는 심리학 박사가 아버지학교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겠다고 5주간 참석해 수료하는 남자들의 아내 100여 명을 앉혀놓고 공식적인 강의 석상에서 "아내가 성관계를 거부하면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싶다고 하니 아내 여러분이 싫어도 그냥 해줘라!"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있는 나라이니 그런 살인마가 선망할 만한 나라가 아닌가?
남성의 생리적 본능 운운하며 간접적인 협박나는 이런 강의를 들으며 심장이 벌벌 떨렸고 (1) 벌떡 일어나 저 말을 반박해야 하나? (2)아님 그냥 혼자 조용히 나가 버릴까? 아님 (3) 끝까지 뭔 소리 하는지 잘 듣고 아버지학교가 잘못되어 있는 점을 정확히 짚어주는 기회로 삼을까? 로 고민을 했다.
결국 나는 세 번째 '정신 차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듣고 아버지학교가 정확히 어느 지점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지적하자'라는 쪽으로 선택했다. 그 짧은 시간에 갈등이 많았다. 이런 찰나에 강의가 끝나고 남편들이 아버지학교 직원들과 똑같은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흰 수건을 하나씩 들고 아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앉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본 받아 아내의 발을 씻어주고 키스해주며 앞으로 헌신적으로 살 것을 약속하는 세족식이 거행되는 것이었다. 주변에 많은 아내들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남편을 어루만지거나 끌어안았다. 아마도 100여 쌍의 부부들이 울며불며 진행되는 그 세족식 현장에서 나도 눈물을 흘리며 남편이 내 양말을 벗기고 발을 씻어주는 그 행위에 감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직전에 그 충격적인 목사님의 강의만 없었더라면….
수료식에서 사회자는 아버지학교가 애국적인 노력으로 캄보디아와 태국까지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고 이 땅에 좋은 아버지를 길러내기 위해 무수한 노력 끝에 법무부 장관 명의 '2011년도 하반기 아버지학교 확대 실시 지시'라는 공문이 전국의 교도소에 하달되었음을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관공서나 군대에도 '아버지학교'가 들어가 섬김 봉사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며 덕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