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 목사그 친구는 이렇게 곱게 나이들어가고 있다. 그의 직함이 너무 많아서 다 소개할 수가 없다. 요즘 그는 8월 말 제주에서 열리는 제5차 간토(관동)조선인 학살 국제 심포지움 준비로 바쁘다.
김민수
그런데 그를 대학 면접 보는 날 만났다. 둘은 씽긋 웃으며 합격을 예견했다. 중학교 시절 장난하는 말로 "우리 이 다음에 같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동목회하자!"라는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대학을 오기 전부터 공장 노동자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고, 이미 사회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어릴 적 약속대로 '공동목회'에 준하는 일을 함께 시작했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지역 노동자의 자녀를 위한 공부방과 놀이방을 열었다. 당시, 그 공부방은 전국에서 가장 활성화된 공부방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교육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회비를 받았기에 한정된 후원구조로는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적자폭도 늘어났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가 결국 경제적인 문제와 건강 문제가 겹치면서 나는 그곳에서 뛰쳐나왔고, 그 친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일을 계속 이어갔다. 친구는 지금 대안학교 '아힘나'를 통해서 다양한 일들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 다양한 일들이 펼쳐지는 동안 서먹한 관계가 유지되었고, 그 서먹한 관계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건강은 그리 오래지 않아 회복됐지만, 경제적으로 IMF 직격탄까지 맞아 이 문제가 꽤 오랜 시간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런 나보다도 아내의 마음고생이 심했던 터였다. 아내는 그 친구를 만난다고만 하면 경계를 했다. 절대로 그 친구와 일하면 안 된다고 다짐을 받곤 했었다. 거의 15년이 지나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서로의 입장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각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각기 자기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