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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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들이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뜸 "군대도 안 간 놈들이 무슨 자격으로 평화를 이야기 하냐!", "다른 사람들이 군대 가서 지켜주기 때문에 너네 같은 인간들이 한가하게 병역거부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주로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 혹은 전쟁을 몸소 겪은 어르신들이 많이 그런다. 그럴 때마다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다"는 억지가 답답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사람들이나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이 나서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평화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소리쳐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나가이 다카시가 쓴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를 보는 순간 '아, 이 사람이 내 답답함을 풀어줄 사람이구나!' 탄성을 내질렀다. 누가 더 끔찍한 지옥을 겪었는지 경쟁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원자폭탄 피폭자가 외치는 '평화'에 딴지 걸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니까. 고백하건데, 누가 나를 대신해서 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좀스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애국자 의사선생님, 평화주의자가 되다<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는 의사이자 방사선의학 연구자인 나가이 다카시가 1945년 8월 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뒤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보고 듣고 조사하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쓴 책이다. 좀스런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첫 부분에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다카시가 병역거부를 옹호했던 평화주의자,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나가이 다카시는 성실하고 책임의식 강한 과학자이자 의사였지만, 전쟁이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이는 피폭된 사람들을 치료하러 성치 않은 몸으로 폐허가 된 길을 헤치고 다니는 인도주의적인 의사였고, 실험기계와 연구자료들이 불타버린 뒤에도 끊임없이 탐구하고 심지어 피폭된 자기 자신조차도 관찰할 정도로 탐구열에 불타는 지식인이었지만, 전쟁이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이 전쟁에 졌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고 '나라가 망한 마당에 환자는 무슨 환자냐', '그따위 환자를 구해 보았자 이제 와서 조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싫다!'고 생각할 정도로 '평범한' 정치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이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오늘날 이런 비참한 일을 맞게 된 것은 여태 일본이 개인의 생명을 너무도 함부로 생각하고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함으로써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군인으로 징집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제자들과 나눈 대화는 사뭇 감동적이다.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한 것이 분하다고, 자기들은 아직 싸울 여력이 있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제자들에게 나가이 다카시는 차분하게 말한다.
"나는 전쟁 중 국가의 최고 명령에 따라 전심전력으로 싸웠습니다. (중략) 우리 젊은 학도들이 끝까지 비겁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진정으로 구호에 매진하였다는 점은, 아무리 일본이 패하고, 일본의 전쟁 목적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일이라도 믿습니다."그러면서 전쟁이 과학에선 진보를 가져오지 않느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렇게 많은 인명과 물질, 그리고 시간을 투자하여 평화를 추구한다면… 틀림없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전쟁은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전쟁을 준비하는 데 들어가는 돈과 시간을 노력을 평화를 위해 들인다면?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와 병역거부자 친구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던 사람이 전쟁의 가장 참혹한 현장에서 죽음을 일상으로 겪으면서 얻은 평범한 진리다.
하지만 이 평범한 진리는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간단히 '철없는 이상주의자들의 몽상'으로 여겨진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가이 다카시는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날, 그때! 이 땅 위에 벌어진 지옥의 형상을 여러분이 단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전쟁을 또 한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