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 당시 미국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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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미국은 공산당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국민당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1945년 4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소련·중국 주재 미국대사들은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원조할 생각이 없다. 장개석에 의한 중국 통일을 지지하며 중국 문제에 대한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한다"는 몰로토프의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중국공산당이 소련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둘째, 미국은 국민당의 국제적 입지를 제고시켜 주었다. 미국은 국민당이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측의 동맹조약을 주선했다. 그 결과물이 1945년 8월 14일 중·소 우호동맹조약의 체결이다.
자본주의 진영의 최강국인 미국에 이어 사회주의 진영의 최강국인 소련마저 국민당의 우군이 되었으니, 국민당은 양 어깨에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공산당은 고립시키고 국민당은 도와준 미국의 행보는 미국이 전쟁의 실질적 당사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미국은 국민당의 군사활동을 지원했다. 미국이 1937~1948년에 국민당 정권에 제공한 금액은 46억110만 달러다. 이 중에서 무상공여 및 차관인 35억2300만 달러의 60%는 국공내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1945년 8월 이후에 제공되었다. 이 돈은 당연히 공산당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당시, 국민당 군대의 253개 사단 중에서 39개 사단은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덕분에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우세한 화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미국의 지원은 또 다른 형식으로도 나타났다. 미국의 중국 방면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장군이 이끄는 육·해·공군은 국민당 군대를 중국대륙 이곳저곳으로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미군은 국공내전에서 '운전수' 노릇도 했던 것이다.
미군은 전투병도 파견했다. 1945년 8월에서 12월까지 10만 명의 미군이 황하 지역에 투입되어 국민당을 지원했다. 또 국민당이 불리한 지역에는 미 해병대가 급파되어 공산당의 기를 꺾어놓기도 했다. 국민당 군대가 코너에 몰린 지역인 상해·청도·천진 등에 5만 명의 미 해병대가 급파된 것은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의 긴급조치였다. 미국이 얼마나 열심히 이 전쟁에 개입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넷째, 미국은 국민당이 불리할 때는 전쟁판을 잠시 중단시키기도 했다. 공산당이 유리할 때는 국·공 양당의 대화를 주선함으로써 국민당에게 쉴 틈을 주었던 것이다. 농구나 배구 경기에서 자기 팀이 불리할 때 작전타임을 요청하는 것과 유사했다.
국민당이 공산당을 상대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생긴 뒤인 1945년 12월 12일 미국의 조지 마셜 전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그에 힘입어 1946년 1월 9일 양당 간에 휴전이 성립된 것은, '내 아이'가 '동네 아이'한테 얻어맞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현대 동아시아 질서 속 미국의 위상위와 같이 미국은 가지가지 방법으로 국민당을 지원했다. 심지어는 전투병도 파견했다. 미국은 사실상 국민당의 후견인 내지는 기획자였다. 미국은 중국을 동아시아 전진 기지로 삼기 위해 이처럼 열심히 돈과 몸과 시간과 머리를 투자했다.
이것은 국공내전이 단순히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이 아니라 실은 미국-국민당 연합과 공산당의 대결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과 연합한 국민당이 이 전쟁의 패자라면, 미국도 당연히 패자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국민당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뒤에 미국이 1948년 1월 6일 '로이얄 성명', 같은 해 10월 7일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권고', 1949년 12월 30일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입장' 등을 통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위해 중국을 포기하고 일본을 선택하겠다"는 입장을 표시한 것은 자신들이 이 전쟁의 실질적 패배자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